
괜히 그런 날이 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지만 마음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질 때.
집에 있어도 마음이 멀리 떠나 있는 날.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이 자리가 아닌 것 같고,
누군가에게 가야 할 것 같은데, 갈 곳이 없는 것 같고.
그럴 때마다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한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우리는 그를 '탕자'라고 부른다.
“아버지, 재산 좀 주세요.”
이 말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니까 탕자는 단순히 집을 떠난 게 아니라, 사랑을 거절하고, 공동체를 부정하고,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뻔했다. 세상은 언제나 달콤한 속삭임으로 유혹하지만, 결국엔 더러운 구정물처럼 영혼을 갉아먹게 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걸 잃고 나서야, 돼지우리 속에서 허기를 견디며 깨닫는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장면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 건, 우리가 모두, 삶의 어느 순간엔 그 탕자의 자리에서 고개 숙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 앞에서, 외로움과 수치심 속에서, 그리고 더 이상 갈 데 없는 막다른 감정의 골목에서.
돌아가는 길보다 더 어려운 건, 어쩌면 다시 돌아갈 용기가 아닐까?
누가복음 15장을 읽을 때, 내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무는 구절은 이거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 (눅 15: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 이 말이 나를 울렸다.
아들은 제대로 사과도 못 했고, 회개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 회개의 본질을 발견한다.
완전한 회개를 해야 받아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돌리는 순간 먼저 달려오시는 하나님.
그 아버지는 매일 아침 그 길을 바라봤을 것이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어쩌면 하루도 빠짐없이 저 멀리 뻗은 길을 응시했을 것이다.
그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사과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완벽히 해야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아니라, 돌아오기로 ‘결정’만 해도 문이 활짝 열리는 집.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혹시 지금 돌아가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 마음으로 서 있지 않은가?
기도가 잘 안되고, 말씀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교회에 가는 것도 왠지 어색하고, 사람들에게 기대고 싶지만 동시에 멀어지고 싶고…
그런 마음이라면, 당신은 지금 '돌아오는 길 어귀'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우리를 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보자마자 달려오시는 분이다. 우리를 향해, 부끄러움과 수치와 자책을 덮기 위해 달려오시는 분이다.
그러니, 그냥 아무 생각 말고 기다리는 분을 향햐 돌아와야 한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다. 기도가 막혀도 괜찮다. 눈물만 흘러도 괜찮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품으로 안는 데 전혀 서투르지 않으신 분이다.
돌아오는 길은 어렵지만,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품이 있다. 우리를 꾸짖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잔치를 여시는 분.
죄보다 크신 사랑, 수치보다 넓은 용서.
그게 복음이다. 오늘도 아버지의 문은 열려 있다. 우리는 모두 그 품이 그립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 (누가복음 1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