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환의 길, 예배의 자리
— 에스라 8장 1-20절이 던지는 회복의 리더십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시대, 바벨론 포로지에서 제2차 귀환을 이끈 에스라는 ‘누가 함께 올라왔는가’를 기록했다. 에스라 8장 1-14절에 등장하는 명단은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복원 선언이었다.
포로의 세대가 잃어버린 이름, 끊긴 계보, 희미해진 신앙의 뿌리를 다시 세우는 행위였다.
당시 유다 공동체는 성전이 무너진 것보다 더 큰 상실 —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붕괴 — 를 겪고 있었다.
따라서 이름을 다시 부르고, 가문의 계보를 다시 세우는 일은 단순한 행정이 아니라 예배적 회복의 시작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 역시 ‘이름 없는 존재들’이 많다. 공동체의 뿌리를 잃고 흩어진 시대에, 교회는 다시금 ‘누가 함께 서 있는가’를 묻고 명단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기억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아하바 강가에서 3일을 머문 에스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한다. “레위 자손이 없었다.”
레위인은 성전과 예배의 중심 사역자였다. 그들의 부재는 단지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예배의 토대가 빠진 위기였다.
에스라는 즉시 결단한다. 그는 총명한 사람들을 선발해 가시야, 엘리엘, 스마야 등 레위 가문으로 보낸다.
그 결과, 레위 사람과 성전 봉사자들이 귀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장면은 영적 리더십의 본질을 보여준다.
리더는 위기를 진단하고, 현실을 탓하기보다 해법을 찾아 움직이는 자이다.
에스라는 귀환의 속도보다 예배의 본질을 우선했다.
그의 시선은 ‘성전이 완성되는가’보다 ‘하나님께 예배할 사람이 있는가’에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의 출발점이다.
본문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 위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감사의 수사가 아니다.
그들은 여정의 모든 순간, 기도로 준비하고, 금식으로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즉, 하나님의 손이 함께했다는 것은 신앙적 준비의 결과였다.
오늘날 신앙의 회복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말은 기적의 종착지가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낸 일상의 흔적이다.
기도 없는 감사, 순정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손이 머물 수 있도록 자신을 정결케 하고, 예배의 자리를 세운다.
귀환은 단순히 ‘돌아감’이 아니다.
그것은 예배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행위였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복귀는 단지 제도의 복원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건이었다.
회복은 건축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예배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에서 시작된다.
오늘의 교회와 사회가 진정한 부흥을 꿈꾼다면, 먼저 예배의 무게를 회복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가 사라진 회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에스라의 귀환 여정은 ‘예배로 돌아가라’는 시대적 명령으로 읽힌다.
에스라는 시대의 행정가이자 영적 리더였다.
그는 현실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예배의 결핍을 해결하며 공동체의 뿌리를 세웠다.
그의 여정은 ‘예배로 세상과 역사 속으로 돌아간 사람’의 이야기다.
오늘 우리 각자도 작은 ‘귀환자 명단’의 한 줄일지 모른다.
그 이름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불릴 때, 진정한 회복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회복의 첫 자리는 언제나 예배의 자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