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를 가장한 통제, 감정의 균질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전체주의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도록 강요당할 때, 자유는 사라진다.”
현대 사회는 다양성과 개인의 감정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정해진 방식으로 공감하고 분노해야 하는’ 감정의 통제 사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SNS는 감정의 전시장이 되었고, 표준화된 감정 반응이 ‘정상’으로 간주된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사회적 압력과 알고리즘의 방향성 속에서 ‘허용된 감정’만을 소비하고 있다.
이 현상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중단에서 비롯되는 전체주의”의 현대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경고했던 전체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순응의 구조, 즉 ‘감정적 획일성’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다르게 느끼는 것’을 두려워한다.
정치적 논쟁, 사회적 이슈, 인간관계의 갈등 속에서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종종 비난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온라인 공간은 감정의 민주화가 아니라, 감정의 표준화를 가속하고 있다.
좋아요, 공감, 분노 버튼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언어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 구조를 단순한 선택지로 축소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개인은 고립될 때 가장 쉽게 조작된다”고 경고했다.
오늘의 디지털 사회는 물리적 고립 대신 감정적 고립을 통해 통제한다.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진 사람은 ‘공감하지 않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그렇게 사람들은 조금씩 자신을 검열한다.
결국, 자유롭게 느낀다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위험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자유롭게 클릭한다고 생각하지만, 선택지는 이미 짜여 있다.”
현대인의 자유는 실제로 ‘통제된 선택’ 위에 세워져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 느끼는 것, 심지어 생각의 방향까지 조정한다.
이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말한 ‘행동의 상실’과 깊이 맞닿아 있다.
그녀는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은 사유보다 반응을, 대화보다 즉각적인 감정 표출을 요구한다.
그 결과,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프로그램된 감정을 수행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만난 전범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 말했다.
아렌트는 이 사건을 통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 생각하지 않고 순응할 때 악은 일상 속에서 자라난다.
오늘날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취소하는 집단적 감정의 폭력 속에서 ‘악의 평범성’을 목격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정해진 도덕적 감정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내면적 성찰은 사라지고, 다수가 공유하는 감정이 ‘옳음’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감정의 전체주의다 — 총칼이 아니라 감정의 동일화로 이루어진 새로운 통제 체계.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사유의 중단이 아니라, 감정의 중단 속에서 동일한 위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자유가 아니라, 인간성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감정을 지키는 일’은 곧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감정이 통제되고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를 낳는다.
우리가 감정의 다양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