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텅 빈 무덤이 아닌 피 묻은 생명
우리는 숨 가쁘게 살아간다. 성공을 향해, 행복을 찾아, 혹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매일을 분투한다. 그러나 문득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 홀로 남은 방 안에서, 혹은 화려한 성취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 구원받은 존재인가?"
이 질문은 종교의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가벼운 물음이 아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궁극적인 운명을 건 가장 치열하고 근원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이 절박한 물음 앞에서, 우리는 결국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라는 신비하고도 선명한 대답 앞에 서게 된다.
피로 쓴 사랑, 절망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
십자가는 본래 저주의 상징이다. 로마 제국이 고안한 가장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처형의 도구였다. 힘과 권력, '상식'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인간의 눈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실패한 혁명가, 무력한 신성모독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달랐다. 성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에는 가장 비참한 처형의 장면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절박한 사랑이 피로 쓴 언약의 무대였다.
죄와 죽음의 법 아래 신음하는 인간을 위해, 창조주가 스스로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와 모든 것을 내어주는 역설적인 사랑의 현장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형벌과 그로 인한 절망의 무게를 대신 감당했다. 구원은 단순히 '죄를 용서한다'는 법적 선언을 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를 뿌리째 뒤흔들어 새로운 생명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이다. 십자가는 절망적인 죽음으로 거룩한 사랑을 이긴 자리가 아니라, 거룩한 사랑으로 절망적인 죽음을 이긴 자리였다.
현실을 뚫고 오는 능력, 2천 년 전의 오늘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오래된 역사'로 치부한다. 박물관의 유물처럼, 오늘 나의 삶과는 무관한 종교적 상징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십자가는 과거에 갇힌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이 순간, 가장 치열한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자주 실패와 죄책감, 상처와 후회로 얼룩지는가. 완벽하게 꾸며진 소셜 미디어의 사진 뒤편에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도사리고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을 손에 쥐고도, 마음 한구석의 깊은 외로움과 허무함은 지울 길이 없다. 바로 그 절망의 자리, 무너진 자존감의 폐허 위에 십자가는 찾아온다.
십자가는 우리가 겪는 고통을 '제거'하는 마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그 고통을 '통과'할 힘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자기와 만물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 흘린 피로 화평을 이루어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다 그분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그래서 환상이 아니다. 오늘도 자기혐오와 패배감에 빠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실재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과거에 붙들려 신음할 때, 십자가는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우리가 또다시 넘어지고 무너질 때마다 십자가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 정직한 거울, '나'를 죽이고 '나'를 살리다
그러나, 십자가가 주는 구원은 결코 값싼 위로가 아니다. 십자가는 따뜻한 위로인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운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먼저 빛 앞에 선 그림자처럼,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죄악과 위선, 교만과 마주하게 된다.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함을 보여준다.
첫째는 '자백'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너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느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우리의 의로움이 얼마나 누더기 같은지, 우리의 선행이 얼마나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럽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이처럼 가식 없는 고백에서 시작된다.
둘째는 '자기 부인'이다. 십자가는 다시 묻는다. "네가 너의 삶의 주인이었던 그 교만을 내려놓고, 나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나'를 죽이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받으려 했던 교만을 부수고, 오직 은혜로만 설 수 있는 겸손한 영혼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가장 정직한 '나'를 만나고, 또한 가장 자유로운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
반면교사가 들려주는 경고
십자가의 길을 거부한 자들의 말로는 분명하다. 그들은 생명의 문을 스스로 닫았다. 예수 시대에 가장 큰 힘과 권력을 쥐었던 로마의 총독, 가장 거룩하고 의롭다고 자부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힘', '의로움'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어리석다 조롱했고, 결국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반면교사'가 가득하다. 외면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내면은 탐욕과 분노로 무너진 사람들. 세상의 거짓된 만족과 쾌락에 취해, 정작 자신의 영혼은 메말라 죽어가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십자가가 묻는 질문을 회피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날카롭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살고 있는가?"
살아 있는 초청, 오늘 시작되는 구원
십자가는 단지 2천 년 전의 끔찍한 사형틀이 아니다.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를 향해 팔 벌린, 살아 있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말한다. "십자가? 너무 오래된 이야기야. 너무 비현실적이야. 약한 자들의 위안일 뿐이야."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절박하고 간절한 하나님의 사랑의 외침이다.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는 유일한 문이다.
우리가 죄의 무게에 지쳐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을 때, 우리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깊은 상처로 홀로 울고 있을 때, 우리가 삶의 의미를 모두 잃고 텅 빈 들판에서 방황할 때, 십자가는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부르며 부드럽게 속삭인다.
"내가 이미 너를 위해 모든 길을 열어 놓았다."
예수의 십자가는 정말 우리를 구원했는가? 그 답은 먼 과거의 역사 책에 있지 않다. 그 답은 바로 오늘, 이 질문 앞에 선 '나'의 삶 속에서 발견된다. 구원은 나의 강함이나 자격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구원은 나의 가장 깊은 연약함 속에서, 내가 완전히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구원은 내가 더 이상 내 힘으로 살 수 없음을 처절하게 고백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때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예수의 마지막 음성을 듣는다. "내가 다 이루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나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흔들리는 나를 붙들어 세우는 살아 있는 구원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오늘, 그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서자.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십자가가 이미 우리의 모든 값을 치렀는데, 우리는 왜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그 빚을 갚으려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