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말하는 정의 vs 성경이 말하는 정의

-'미쉬파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체데카'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회복이 완벽하게 해결된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값을 치르지 않는 정의의 구호가 아니라, 나의 것을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는 '체데카'의 실천이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우리는 '정의'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뉴스에서 끔찍한 범죄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피가 끓는다. 직장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거나, 사회적 약자가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분노한다. 이 분노는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영혼에 새겨진, '올바름'에 대한 갈망의 흔적이다. 우리는 모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정의'의 실체가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는 기본적으로 '균형'과 '보복'에 기초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원칙이 그 원형이다. 내가 받은 피해만큼 상대방도 고통받아야 하고, 내가 노력한 만큼 정확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권리'의 정의다. 나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그것을 회복하거나 침해한 자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물론 이것은 무질서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장치다.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현대 사회는 정의를 '공리(utility)'의 극대화나 '권리(rights)'의 보장이라는 틀에 가두려 한다. 그는 이 두 가지 잣대로는 진정한 정의를 이룰 수 없으며, 정의란 '미덕(virtue)'을 장려하고 '공동선(common good)'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의 통찰은 '내 몫'만 챙기는 차가운 권리 중심의 정의에 대한 중요한 반성이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결정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그가 말하는 '미덕'과 '공동선'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하는가? 그 기준 역시 결국 인간 이성의 합의나 공동체의 전통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세상 정의의 근본적인 한계다. 그 기준이 '나'이든, '우리'이든, 결국 '하나님 없는 인간'을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인간'이기에, 세상의 정의는 차갑다. 법정의 저울은 정확할지 모르나 따뜻하지 않다. SNS에서 벌어지는 '정의 구현'이라는 이름의 무자비한 조리돌림을 보라. 그것은 종종 정의의 탈을 쓴 또 다른 폭력이 된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약자를 '노력하지 않은 자'로 낙인찍는 시선 속에는, 강자의 논리가 숨어 있다. 결국, 세상의 정의는, 그것이 샌델의 '공동선'을 추구할 때조차도, 힘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승자의 서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정의는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오직 '내 몫'을 챙기는 데 집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세상의 정의가 실현된 곳에서도,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공허하다.

 

성경이 이 거대한 질문에 답할 때, 우리는 종종 당황한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고, 뜨겁기 때문이다. 성경은 '미쉬파트(מִשְׁפָּט)'와 '체데카(צְדָקָה)'라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을 제시한다. '미쉬파트'는 우리가 아는 '공의'와 가깝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죄를 처벌하며, 공정한 재판을 통해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며,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것이 '미쉬파트'다. 세상의 정의가 그토록 갈망하는 것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그림자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는 '미쉬파트'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체데카'에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체데카'는 '의로움' 또는 '자비로운 정의'로 번역된다. 이것은 단순히 죄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모든 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체데카'는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권리를 기꺼이 내어주어 공동체와 약자를 살리는 행위다. 즉, '미쉬파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체데카'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가게 주인이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최저임금을 정확히 계산해서 지급했다면, 나는 '미쉬파트'를 행한 것이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은 샌델이 말하는 '권리'의 정의를 지킨 것이다. 그러나 그 아르바이트생이 병든 노모를 모시며 학업을 이어가느라 끼니를 거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그에게 월급 외에 따뜻한 밥을 챙겨주고, 그의 가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나의 것을 나누어 주었다면, 그것이 '체데카'다. 세상의 정의는 최저임금 지급으로 끝나지만, 성경의 정의는 그 영혼이 회복되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살도록 돕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체데카'는 구약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열망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즉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을 돌볼 것을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체데카'는 시혜나 동정이 아니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를 생각할 때, 우리도 이웃에게 '체데카'를 행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계산적인 정의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요구다.

 

그렇다면, 이 두 정의, 즉 공의로운 심판(미쉬파트)과 자비로운 회복(체데카)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죄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미쉬파트'의 요구와, 죄인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체데카'의 열망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이 딜레마를 풀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무자비한 심판으로, 때로는 무책임한 용서로 치우친다. 이 모순이 완벽하게 해결되고, 두 정의가 뜨겁게 입 맞춘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불의와 죄악을 향한 자신의 거룩한 진노(미쉬파트)를 하나뿐인 아들 예수에게 남김없이 쏟아부으셨다. 죄에 대한 대가는 남김없이 치러졌다. 공의는 100% 만족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체데카)를 확증하셨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그의 '체데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류 역사의 중심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상의 정의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정의('미쉬파트'와 '체데카')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내가 받아야 할 심판(미쉬파트)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고, 내가 감히 누릴 수 없는 의로움(체데카)은 거저 받았다. 이 사실을 영혼 깊이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 '내 몫'을 달라며 세상의 정의를 휘두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체데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의'를 외친다. 그러나, 그 외침의 대부분은 '내 권리'를 되찾기 위한 세상의 '미쉬파트'에 머물러 있다. 교회마저도 이 세상의 정의 구현에만 몰두한 나머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체데카'를 잃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값을 치르지 않는 정의의 구호가 아니라, 나의 것을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는 '체데카'의 실천이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이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라, 화해의 제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오늘, '받을 몫'을 요구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설 것인가, 아니면, '치러야 할 몫'을 감당하는 화해의 제물이 될 것인가?

 

작성 2025.11.06 06:02 수정 2025.11.0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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