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빛의 근원: 행위인가, 은혜인가?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거울과 같다.
동양의 오랜 지혜 '근주자적(近朱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은 이 경험 위에서 더욱 묵직한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붉은 것을 가까이하면 붉어지고 검은 것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이 간결한 통찰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하며, 무엇을 지향하는지가 곧 우리의 정체성을 빚어낸다는 사실을 꿰뚫는다.
이 지혜의 거울은 놀랍게도 이슬람의 신앙 공동체 ‘움마(Ummah)’와 기독교의 ‘에클레시아(Ekklesia)’를 동시에 비춘다. 두 공동체 모두 개인이 홀로 신앙을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하며, ‘물듦’의 원리를 신앙의 핵심 동력으로 삼는다.
함께 물드는 삶의 원리
이슬람은 ‘움마’라는 거대한 유기체적 공동체를 통해 신앙을 구현한다. 그들에게 신앙은 개인의 고독한 수행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호흡하는 삶 그 자체이다. 하루 다섯 번 같은 방향을 향한 기도, 라마단의 동시적 금식, 금요일의 합동 예배는 개인을 ‘움마’라는 거대한 정체성 안에 녹여내는 용광로다.
그들은 교제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는 이를 "사향(麝香)을 파는 자와 대장장이"의 비유로 설명한다. 훌륭한 친구(사향 상인)는 사향을 주거나, 사게 하거나, 최소한 좋은 향기라도 맡게 하지만, 나쁜 친구(대장장이)는 옷을 태우거나 고약한 냄새를 옮긴다. 이는 경건한 자들과의 교제(ṣuḥbah ṣāliḥah)를 통해 그 '향기'에 물들고, 세속의 '그을음'을 피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기독교의 ‘에클레시아’에도 너무나 익숙하다. 성경 역시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잠언 13:20),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린도전서 15:33)라고 분명히 경고한다. 초대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에 잠식되지 않도록 서로를 붙들어주는 영적 공동체였다. 이처럼 움마와 에클레시아는 모두 '근주자적, 근묵자흑'의 원리가 작동하는 거대한 영적 자기장이라는 점에서 깊은 공통점을 지닌다.
운명을 가르는 질문: '주(朱)'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 거대한 유사성의 지반 아래, 두 신앙의 본질을 가르는 심연이 존재한다.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를 붉게 물들이는 그 '주(朱)', 즉 거룩함의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다.
이슬람에게 그 '붉음'의 원천은 신의 법, '샤리아(Sharia)'와 예언자의 삶인 '순나(Sunnah)'이다. 무슬림에게 의로움이란 이 신적 규범을 삶으로 정확히 살아내는 '성취'이다. 물론 여기에는 신의 뜻을 찾으려는 역동적 노력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의 순종과 의지적 노력이 자리한다.
움마 공동체의 역할은 이 길에서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감시하며, 함께 규칙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는 '지하드 알 나프스(jihād al-nafs, 내면과의 투쟁)', 즉 스스로를 '붉게' 만들어가려는 장엄하고 고된 투쟁이다.
반면, 복음주의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주(朱)'는 율법이나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인격,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다. 기독교의 '근주자적'은 붉은색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검은색이었던 존재가 붉은 피에 '잠기는' 사건이다.
의로움은 우리가 노력해서 획득하는 속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새로운 신분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존 스토트가 '대속의 교환(the great exchange)'이라 칭했듯,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가 맞바뀌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슬람의 '근주자적'이 행위(doing)를 통해 존재(being)를 바꾸려는 시도라면, 기독교의 '근주자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됨으로써 새로운 행위(new doing)가 흘러나오는 원리이다. 우리의 붉음은 우리 자신의 경건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가진 능력의 결과이다.
은혜의 비극: 율법으로 회귀한 에클레시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겨누어야 한다. 우리는 입술로는 은혜를 말하면서, 실제 공동체 안에서는 이슬람의 움마보다 더 지독한 율법주의를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새로운 신자가 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붉게' 되었음을 기뻐하는가, 아니면 그의 삶에 남은 '검은 얼룩'(습관, 연약함)을 지적하며 정죄하는가? 교회 안에서 직분, 헌금, 봉사의 잣대로 '더 붉은 성도'와 '덜 붉은 성도'를 나누는 순간, 우리의 에클레시아는 복음의 능력을 잃고 '샤리아'를 좇는 또 다른 움마로 전락한다. 팀 켈러가 지적했듯, 우리는 복음을 잃어버린 '집 안의 탕자'(맏아들)가 되기 너무나 쉽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돌아가려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절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갈라디아서 3:1)는 오늘 우리를 향한 경고이다.
우리가 모두 본질상 '묵(墨)', 즉 진노의 자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붉음은 자가발전이 아닌, 오직 은혜의 '수혈' 덕분이다. 그렇다면 참된 기독교 공동체는 서로의 '검음'을 비난하는 심판정이 아니라, 서로의 얼룩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주고 씻어내는 '영적 세탁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붉어지라'고 요구하는 감시자가 아니라, 우리를 붉게 만드신 은혜의 근원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손 내미는 동료 순례자일 뿐이다.
무엇에 잠길 것인가
'근주자적, 근묵자흑'. 이 지혜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빛깔에 물들고 있는가? 이슬람의 움마는 율법과 공동체의 힘으로 그 답을 찾으려 고귀하게 분투한다.
그러나 복음은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붉은색에 가까이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를 단번에 붉게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붉은 잉크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삶이 아니라, 그분의 보혈이라는 붉은 바다에 온전히 잠기는 삶이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과 같다. 우리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행위'를 평가하여 붉은색을 요구하는 곳인가, 아니면 그들의 '존재'를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주는 곳인가?
우리의 삶은 결국 무언가에 물들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서로를 판단하는 율법의 '검은빛'인가, 아니면 모든 죄인을 덮고도 남는 은혜의 '붉은빛'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