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예수'라는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할까?

-역사의 그림자, '예수'라는 이름에 드리운 상흔.

-개인적 상처와 왜곡된 이미지가 만든 감정적 장벽.

-신앙과 정치가 혼동될 때 생기는 이념적 반감.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길거리에서, 또는 조용한 대화 중에 ‘예수’라는 이름이 불쑥 등장할 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갑자기 시선을 돌리고, 어떤 이들은 의미 모를 침묵으로 대화를 끝낸다. 단순한 고유명사 하나가 이처럼 강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한 개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기억, 문화적 이미지, 심리적 불안, 그리고 세계관의 충돌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이다.

 

역사의 그림자, '예수'라는 이름에 드리운 상흔

 

기독교는 지난 2천 년간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다. 복음은 수많은 생명을 살렸고, 사회 정의와 인권, 교육과 의료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재판, 십자군 전쟁, 식민지 전도, 정치적 선전 도구 등으로 악용된 역사도 존재한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 시대,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기쁨이 아니라 문화적 침략과 억압의 도구처럼 비쳤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가 일제시대 이후 정치와 결탁하거나, 일부 집단의 권력 확대 수단처럼 오해받은 전례가 있다. 이처럼 과거의 어두운 장면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한, '예수'라는 이름은 단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과거의 억압과 위선의 상징으로 투사되기도 한다.

 

현대인의 자율성과 복음의 절대성이 충돌할 때

 

현대 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 상대적 진리를 중시한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의 선언은 신자에게는 생명의 선언이지만, 다원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오만하거나 독선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복음이 제시하는 '죄'와 '구원', '회개'의 개념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찌르는 메시지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러한 실존적 질문 앞에서 불안을 느끼며 방어적 태도를 취한다. 결국 '예수'는 삶을 송두리째 다시 돌아보게 하는 존재이기에, 그 이름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개인적 상처와 왜곡된 이미지가 만든 감정적 장벽

 

'예수'라는 이름에 대한 거부감은 종종 예수님 자신보다는, 예수를 말한 사람들로 인해 생긴다. 무례한 전도, 위선적인 신앙인의 태도, 가정 내 신앙 강요로 인한 상처는 예수를 떠올릴 때마다 감정적 반감을 유발한다.

 

​여기에 더해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콘텐츠는 일부 기독교인의 극단적인 모습이나 부패한 교회의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며, 예수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킨다. 대중은 본래의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왜곡된 이미지로 그분을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라는 이름을 감정적 피로의 언어로 만들고 만다.

 

신앙과 정치가 혼동될 때 생기는 이념적 반감

 

특정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특정 정치 세력, 또는 보수적 이념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종교와 정치가 얽혀 있는 곳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조차 정치적 견해처럼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진심과는 무관하게 그 이름이 어떤 사회적 프레임 속에서 거부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결국 신앙 고백은 순수한 영적 표현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처럼 해석되며 편 가르기의 한 요소로 전락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을 앞세워 오만하게 말했던 우리의 태도, 강요했던 방식, 삶으로 증명하지 못했던 우리의 신앙을 거부하는 것일까? 복음의 본질은 여전히 아름답고 위대하다. 하지만, 그 복음을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될 수도 있고, 피로한 이념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삶이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를 말하기 전에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강요보다 이해, 판단보다 품음, 설득보다 사랑이 복음의 진실함을 증거할 것이다. 진정한 복음 전도는 논리나 전략 이전에, 복음을 향기처럼 살아내는 것이다.

 

당신이 전하려는 ‘사랑의 언어’는 왜 어떤 이들에게 ‘배척의 언어’로 들리는가?
 

작성 2025.11.05 01:21 수정 2025.11.0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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