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세계는 지금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산업혁명의 격랑 속에 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반도체, 그리고 인재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이며, 기술 패권은 곧 경제력과 국력의 문제로 직결되고 있다. 최근 엔비디아(NVIDIA)가 한국 정부와 주요 기업에 고성능 GPU 26만 개를 공급하기로 한 협력 발표는 단순한 기술 거래를 넘어, 한국이 세계 AI 생태계의 중심축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는 방한 중 “한국은 AI 전 단계 공정에서 경쟁력을 갖춘 나라”라고 평가하였다. 이는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적 진단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통신기술, 자동차 산업 등 이미 세계 정상급 기술 기반을 갖춘 한국은 AI 산업혁명을 주도할 충분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GPU 확보로 그동안의 병목이던 연산 자원 한계를 해소함으로써, AI 연구개발과 산업 전반의 융합이 가속화될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AI 강국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하드웨어 확보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AI 산업혁명의 성패는 기술의 양이 아니라 생태계의 질에 달려 있다. 정부, 산업계, 학계, 지방정부가 협력하여 AI 기술을 행정, 산업, 교육, 복지 등 사회 전 영역에 스며들게 하는 국가적 전략이 절실하다.
첫째, 데이터 주권의 확보가 출발점이다. AI의 성능은 데이터의 질과 접근성에 좌우된다. 정부와 지자체는 공공데이터를 적극 개방하되, 개인정보 보호와 알고리즘 투명성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단순히 ‘데이터 댐’을 쌓는 차원을 넘어, 공공정책·복지·의료·안전 등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 해결에 AI를 직접 활용하는 사회적 구조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둘째, AI 융합형 인재 양성이 핵심 과제이다. 우리나라의 AI 전문 인력은 글로벌 수요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대학 교육은 여전히 산업 현장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업은 실무 경험을 갖춘 인재를 확보하기 어렵다. 정부는 단기 기술교육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법률·행정·보건·지방자치 등 각 분야별로 AI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융합형 인재 양성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에 AI 기반 행정 역량을 확산시켜 지역 단위의 행정혁신이 동반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규제혁신 없이는 기술혁신도 불가능하다. 기술 발전의 속도에 비해 제도는 여전히 과거의 틀에 머물러 있다. 인공지능 규제특구 확대, 신기술 선(先)허용·후(後)평가 체계 도입 등 과감한 제도 실험이 요구된다. 정부는 기술 도입 초기의 위험을 국가가 일정 부분 분담함으로써 산업 현장의 혁신을 촉진해야 하며, 스타트업이 기술을 현실적 서비스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불합리한 규제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AI를 둘러싼 국제 경쟁은 이미 ‘기술 경쟁’을 넘어 ‘산업 생태계 경쟁’으로 전환되었다. 미국은 민간 주도형 모델을, 중국은 국가 통제형 모델을 선택하였다. 한국은 이와 다른 민관협력형 ‘소버린 AI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국가는 제도적 기반과 인프라를 제공하고, 민간은 그 토대 위에서 혁신을 가속화하는 상호보완적 생태계를 형성해야 한다.
엔비디아와의 협력은 한국이 AI 산업혁명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올라섰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기회를 일시적 기술 호재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국가 발전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다. 정부는 차기 단계의 국가 AI 로드맵을 마련하고, 이를 법제화·제도화하여 지속 가능한 정책 틀로 발전시켜야 한다.
18세기 산업혁명에서 영국이, 20세기 디지털 혁명에서 미국이 세계 질서를 주도했듯, 21세기 AI 산업혁명은 대한민국이 새로운 질서를 이끌 수 있는 역사적 기회이다. 첨단 기술, 인재, 제도, 그리고 국민적 신뢰의 균형이 조화를 이룰 때, 한국은 더 이상 AI 추격국이 아니라 AI 시대를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박동명
▷법학박사, (주)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전)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 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