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가 해석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영성과 질서



장재형목사의 데살로니가전서 5장 강해를 통해, 핍박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과 견고한직제로 칭찬받았던 초대 가정교회의 모델을 탐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리더십 존중, 상호 돌봄, 그리고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현대 교회가 추구해야 할 본질임을 역설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고 예언을 존중하며, 영과 혼과 몸의 통전적 성화를 이루는 종말론적 신앙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바울 서신에 비친 초대교회의 원형을 오늘의 목회 현장으로 정밀하게 옮겨오는 데 천착해 왔다. 그에게 마게도냐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는 과거의 사례 모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성령의 임재가 구체적 질서와 공동체 윤리 속에서 맥박 치던 살아 있는 본보기다. 그는 초대교회를 단순히 복고적으로 복제하자는 데 머물지 않고, 그 모범을 딛고 더 아름답고 견실한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는 로마의 중심에서 먼 변방임에도 핍박 한가운데서 칭찬을 받았고, 바울이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살전 5:27)고 당부할 만큼 신뢰받았다. 장재형 목사는 이 당부를 사도적 가르침이 가정교회 전체를 하나로 묶는 공적 규범이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 역시 같은 질서와 같은 영적 습관 속에서 하나됨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의 시선은 무엇보다가정교회에 머문다. 주후 4세기 무렵까지 교회의 보편적 형태는 대규모 성전이 아니라 신자들의 집에서 드리는 예배였다. 공간은 누추했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말씀을 향한 사모, 성령의 임재에 대한 경외, 서로를 세우는 사랑, 그리고 분명한 직제가 있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구조가 환난과 핍박을 견딘 실질적 힘이었다고 분석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강해는 그 힘의 구조를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그러므로 서로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살전 5:11)는 말씀은 지도자가 부재한 동안에도 스스로 신앙의 질서를 지킨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의 진심 어린 찬사로 읽힌다.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핍박으로 떠나야 했고, 디모데의 재방문조차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 공백을 공동체는 상호 권면과 덕 세움으로 메웠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오늘의개척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한다. 세계 곳곳에서 복음의 개척이 이루어지는 지금, 교회 설립을좋은 위치큰 건물확보로 오인하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초대교회가 신자들의 집에서 시작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도가 세운 질서를 따라 신앙의 세계를 열어 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리더십에 대한 그의 해석은 5 12–13절에서 정점을 이룬다. 바울은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알아 주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리더의 직무를수고·다스림·권면의 세 축으로 정리한다. 수고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헌신이고, 다스림은 질서와 방향을 세우는 과업이며, 권면은 신자들의 현실을 분별로 돕고 때로는 훈계로 치유하는 목회적 대화다. 그는 이 직무가 대형 제도권 교회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가정교회에서도 온전히 요청되었음을 강조한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밀레도에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고별 설교를 나눈 장면은 작은 교회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장로와 목자라 불리는 리더가 세워졌음을 보여 준다. 장로교회의프레스비(장로들의 모임)’라는 이름이 가리키듯, 교회는 리더를 존중하고 교육하여 세우는 일을 질서의 핵심에 두어야 한다. 바울의알아 주라는 요청은 단순한 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수고를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고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협력하라는 명령에 가깝다(살전 5:13).


그는 사도행전 20 4절에 나열된 바울의 동역자들을 리더십의 실체로 비춘다. 베뢰아의 소바더, 데살로니가의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의 가이오, 디모데, 그리고 아시아의 두기고와 드로비모 같은 이름들은 단순한 수행원이 아니라 각 지역 교회의 핵심 리더들이었다. 장재형 목사는세군도라는 이름을 가진 현대인을 만난 일화를 곁들여, 그 이름이 사도를 죽음의 위협에서 지키던 헌신적 동역자의 이름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이야기들은 리더십을 추상적 직함이 아니라 피와 땀의 서사로 감각하게 만든다. 오늘의 교회가 장로와 목자를 신실하게 길러 세워야 한다는 그의 권면은 이 역사적 전거 위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이어지는 5 14절은 공동체의 시선을앞에 있는 자들에서뒤에 있는 자들로 돌린다. 규모 없는 자들, 곧 공동체의 대열에서 이탈해 방황하며 제대로 일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선 정신을 차리게 하는 단호한 권계가 필요하다. 마음이 약한 자에게는 위로가, 힘이 없는 자에게는 붙들어 주는 실제적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의 바탕에는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요청이 깔려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인내를 씨 뿌리는 비유( 8:15)의 결실을 가능케 하는 토양으로 해석한다. 낙심과 분노, 오해와 상처가 교차하는 현실에서, 인내는 유약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다시 질서로 불러들이는 가장 강한 미덕이다. 때로는 요나서가 보여 주듯 선교자의 마음도 성찰해야 한다. 의롭다는 자기 확신이 하나님의 긍휼보다 앞설 때, 공동체는 곧바로 딱딱해지고 냉소적이 된다. 인내는 이 균열을 메우는 영적 강근함이다.


5 15절의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권면은 공동체 윤리의 정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예수의 황금률을 떠올린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5:39),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는( 5:41) 태도는눈에는 눈이라는 보복률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 윤리의 척추다. 로마서 12장의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21)는 말은 정서적 슬로건이 아니라, 불의와 모욕의 순간을 통과하는 전략이자 훈련이다. 공동체가 이 윤리를 체화하면, 바닥을 치는 갈등의 순간에도 악순환을 끊고 회복의 여지를 만든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속에서도 칭찬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5 16–18절의 세 가지 명령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 신자의 일상에 스며들도록 해설된다. 그는 이 명령들을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한 사도의 표현에 주목해, 그리스도인이 막연히 찾는 하나님의 뜻이 사실은 일상의 태도에 깃들어 있음을 밝힌다. ‘항상이라는 부사는 현실의 바람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기억함으로 시선을 고정하라는 요청이다. 에베소서 1장이 밝히듯 구원과 기업과 영광의 소망을 묵상할 때, 시련 속에서도 기쁨의 근거는 견고해진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은 영적 호흡과 같다( 150:6). 엘리야가 일곱 번 응답을 구했듯, 신자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고 의탁하는 법을 배운다. 에베소서 1 15–23절이 제시하는 지혜와 계시의 영,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우리의 기도를 특정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긍정적 사고의 주문이 아니라, 옥중에서도 찬송한 바울과 실라( 16)의 장면이 보여 주듯, 감사가 현실을 열어젖히는 힘임을 일깨운다. 고린도후서 11장에 열거된 바울의 고난 목록은 감사가 고통의 부정이 아니라, 은혜의 기억으로 현실을 견디고 바꾸는 영적 태도임을 증명한다.


5 19–22절은 은사와 질서의 균형을 다룬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권면은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경솔하게 흘려버리지 말라는 주의다. 장재형 목사는 수련회의 기억을 빗대어, 은혜의 기름을 일상으로 가져와 말씀과 기도로 보존하라고 권한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는 당부는 소망을 일으키는 말의 사역을 공동체가 존중해야 함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14 19절이 말하는깨달은 다섯 마디처럼, 예언은 난해한 신비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분명한 권면일 때 빛을 발한다. 바울이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했듯( 6:17, 살전 5:8), 소망을 일깨우는 예언은 신자들의 마음을 보호한다. 동시에 그는 사도의 치리와 예언자의 감동이피차 복종”( 5:21)의 질서 안에서 호흡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도는 예언을 경청하고, 예언자는 사도의 지도와 홀을 존중한다. 한쪽을 멸시하거나 과도하게 절대화하는 극단은 모두 공동체를 병들게 만든다.


이 균형의 구체적 모델로 장재형 목사는 안디옥 교회를 든다. 거기엔 선지자들과 교사들, 두 그룹만이 중심에 있었다( 13:1). 그는 이 그림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해, 예언자 그룹이 공동체의 시야를 넓히고 미래의 방향을 비추는 한편, 교사 그룹은 율법과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신학적 밀도를 높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다수의 성경 교사를 길러 내는 비전을 말한다. 교회 안 다른 부서가 일시적으로 비어 있어도,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과 소망을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공동체가 숨을 쉰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분별하라는(살전 5:21) 권면을 덧붙인다. 분별은 은사를 억압하는 잣대가 아니라, 은사를 더 맑게 흐르게 하는 정수 필터다. 선한 것을 굳게 붙들고(“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멀리하는 엄정함(살전 5:22)이 있어야, 카리스마와 제도가 건강하게 공존한다.


설교의 결말에서 장재형 목사는 5 23–24절의 축복 기도를 통해 바울의 독특한 인간 이해영과 혼과 몸를 비춘다. 이는 신자의 삶이 파편화되지 않고통전성을 회복해야 함을 뜻한다. 예배와 공부, 노동과 쉼, 개인의 성화와 공동체의 평화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얽힐 때, 신자는 주님 오실 날까지 흠 없이 보전된다. 무엇보다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약속은 성화가 인간의 의지력 경연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인한다. 그래서 바울은우리를 위해 기도하라”(살전 5:25)고 공동체에 자신을 연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를 맞으라는 인사는 그레코로만 문화의 인사법을 교회가 거룩한 교제로 전환한 상징이며(살전 5:26),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5:27)는 준엄한 명령은 사도적 가르침이 특정 집단이 아닌 모든 가정교회에 편만하게 전파되어야 함을 선포한다. 마지막의 은혜 선언(5:28)은 교회의 시작과 끝, 그리고 사이사이의 모든 순간이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새긴다.


이 모든 해석은 오늘의 목회 현장에 곧바로 접속한다. 개척의 시대를 사는 교회에게 그는무엇으로 시작할 것인가?”를 묻는다. 좋은 건물과 입지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교회 그 자체는 아니다. 첫날부터 필요한 것은 사도가 세운 질서다. 섬기는 리더와 순종하는 회중,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문화, 말씀과 기도로 은혜를 보존하는 습관, 예언을 귀히 여기되 분별로 정화하는 태도,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윤리이것들이야말로 교회가 어떤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다. 장재형 목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자생적 질서를 그 핵심 논리로 제시한다. 지도자가 떠나 있는 동안에도 무너지지 않는 공동체는 우연히 생기지 않는다. 평소에 서로를 알아 주고, 수고하는 리더를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며,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을 훈계하고 위로하며 붙들어 주는 꾸준한 습관이 위기의 시간을 견디게 한다. 그래서항상·쉬지 말고·범사에라는 부사는 장식이 아니라 구조다. 매일의 삶에서 반복되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공동체 전체를 떠받치는 토대가 된다.


한편 그는 교회를관계적 학교로 본다. 리더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며 양떼를 지키고, 회중은 그 수고를 알아 주며 사랑으로 존중한다. 규모 없는 자를 향한 권계는 냉혹한 배제가 아니라 치유를 위한 엄정함이고, 마음이 약한 자를 향한 위로는 감정적 동정에 머물지 않고 말씀에 근거한 격려로 이어져야 한다.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는 일은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 동행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의 공기에는 인내가 흐른다. 인내는 공동체를 느슨하게 만드는 방임이 아니다. 오히려 악순환을 끊고 회복을 준비하는 강한 덕목이다. 여기에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명령이 더해질 때, 은혜는 예배와 수련회의 순간을 지나 일상으로 번져 나간다. 말씀과 기도가 은혜를 흘리지 않게 하는 항아리라면, 분별은 그 은혜를 탁하지 않게 하는 거름종이다.


결국 장재형 목사의 데살로니가전서 5장 강해는 하나의 결론으로 녹아든다. 교회의 시작과 끝은 은혜다. 은혜는 질서를 낳고, 질서는 사랑을 보호하며, 사랑은 환난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탱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러했고, 오늘의 교회도 그러할 수 있다. 복음이 낯선 도시에서든 오래된 교회가 새 숨을 찾는 자리에서든,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화려한 건물의 설계도가 아니라 사도적 질서가 빚어 내는 아름다운 세계다. ‘항상·쉬지 말고·범사에라는 보편 명령을 개인의 일상에 내려앉히고, ‘수고·다스림·권면이라는 리더의 직무를 공동체가 함께 떠받치며, ‘예언·분별·보존이라는 영적 훈련을 균형 있게 실천할 때, 작은 가정교회에서도 세계를 변화시키는 교회가 자란다. 장재형 목사가 오늘의 청년과 대학생, 목회자와 평신도, 개척자와 기존 교회에 건네는 요청은 간결하다. 장소가 아니라 질서, 이벤트가 아니라 습관, 감정이 아니라 은혜, 의도가 아니라 순종을 붙들라는 것이다. 바울이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고 했듯, 이제 우리는 초대교회의 편지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고, 우리의 집과 일터와 캠퍼스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때 데살로니가 교회의 칭찬이 오늘의 교회 위에도 머물 것이다. 그리고 미쁘신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끝내 이루실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출발하면 된다.


davidjang.org
작성 2025.11.04 13:20 수정 2025.11.0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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