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공정”이라는 말에 매혹되어 있다. 시험의 결과가 공정해야 하고, 채용의 기회가 공정해야 하며, 모든 경쟁이 똑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은 묻는다. “정말 이것이 가능한가.” 현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조건에서 출발한다. 어떤 이는 부유한 가정에서 충분한 교육 기회를 얻고, 또 어떤 이는 아무것도 없이 출발한다.
표면적으로는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상 출발선은 불평등하다. 성과와 실적에 따라 보상하는 사회는 결국 약자를 더욱 약하게 만들고, 강자를 더욱 강하게 한다. 우리는 이 현실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성경은 이미 인간 사회의 불완전함을 말해 준다. 바울은 단호히 선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로마서 3:23, 현대인의 성경). 인간의 제도와 질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 위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거한 그 의입니다”(로마서 3:21). 인간이 만든 공정은 언제나 한계가 있지만, 복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품는다.
십자가 앞의 새로운 공평
하나님의 의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만의 복음이 아니며, 당시 헬라인만의 것도 아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라고 강조한다(로마서 3:22). 다시 말해,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다. 이것이 복음의 공평이다.
교회는 세상처럼 비교와 경쟁의 무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도 종종 ‘메리토크라시’의 논리가 작동한다. 누가 더 봉사했는지, 누가 더 헌신했는지로 서로를 평가하고, 은밀히 서열을 매길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달랐다.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시고 칭찬하신 예수님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중심을 보셨다(마가복음 12:43-44).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모두가 은혜로만 설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진정한 공평이다.
다문화 사회 속 교회의 사명
오늘날, 우리는 다문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이주민, 난민, 다문화 가정은 이제 낯선 존재가 아니라 우리 곁의 이웃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종종 세상의 잣대를 닮아 있다. 경제적 기여도, 사회적 지위, 문화적 차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고 평가한다. 교회마저 이 기준을 따라간다면, 복음은 힘을 잃는다.
기독교인의 선교는 멀리 떠나는 일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바로 우리 동네, 우리의 교회 문 앞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의는 인종, 문화, 신분의 장벽을 넘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졌다.
교회는 이 진리를 살아내야 한다.
교회가 먼저 다문화 가정을 환대하고, 이주민의 친구가 되며, 난민과 함께 밥상을 나눌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복음을 보게 될 것이다. 복음의 보편성은 이 땅의 새로운 선교적 기회이자 도전이다.
로마서의 구절은 우리에게 위로와 동시에 도전을 준다. 위로는 분명하다. 우리는 실패와 부족함 때문에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전도 분명하다. 우리의 교만과 자랑은 모두 무너져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공정 경쟁을 닮아가서는 안 된다. 복음의 공평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이 이 진리를 붙들도록 가르쳐야 한다. 주일 설교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고, 다문화 사회 속에서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의만을 붙드는 삶으로 성도들을 파송해야 한다.
우리의 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 인간의 불가능 위에 하나님의 가능이 세워진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교회의 사명이다.
“세상은 불완전한 공정을 말하지만,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품는 하나님의 공평을 증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