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은 늘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산청 지리산 백두대간의 들머리, 웅석산(해발 1,099m)을 오르며 나는 문득 한 단어를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청계저수지를 지나던 익숙한 길, 그리고 억새와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가을바람 속에서 그 말이 새삼스럽게 깊게 다가왔다.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았다. 천왕봉을 향해 열린 시야 속에서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가을 산행은 봄 산행과 다르다. 봄이 생명의 기운을 외부로 터뜨리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그 기운을 다시 내면으로 모으는 계절이다. 산은 조용히 말한다. “고맙습니다.” 이 한마디 속에는 계절의 순환, 인간의 겸손,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사가 함께 녹아 있다.
우리가 ‘고맙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을 때, 그 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삶의 리듬과 연결된 언어적 숨결이다. 웅석산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 말을 되뇌이자, 나 자신이 한없이 작고 겸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맙습니다'의 어원을 추적하다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이들은 '곰 맞습니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곰은 단군신화 속 ‘웅녀(熊女)’로, 인류의 어머니이자 한민족의 기원을 상징하는 존재다.
‘곰 맞습니다’ - “우리는 곰족이 맞습니다.” 이 말에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정체성의 확인이 담겨 있다. 즉, ‘고맙습니다’는 단순히 상대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뿌리와 조상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언어적 의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물론, 국립국어원의 「한글맞춤법 표준어규정 해설」에 따르면 ‘고맙다’는 말은 ‘고마움’이라는 감정에서 파생된 순우리말로, 한자어나 외래어가 아닌 우리말의 정수(精髓)로 여겨진다. 그러나 언어는 단지 문법의 틀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말에는 시대와 신화,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흐른다. 따라서 ‘고맙습니다’의 본래 의미를 신화적 상징과 함께 되새기는 것은, 언어를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문화적 기억의 저장소로 보는 태도이기도 하다.
단군신화는 단순한 건국 설화가 아니다. 그것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생명 서사다. 웅녀는 인간이 되고자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굴에 머물렀다. 그 인내와 정성의 시간이 끝나자, 하늘의 신 환웅이 내려와 그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한민족의 시작을 ‘감사의 인내’와 ‘조화의 만남’으로 그려낸다. “곰 맞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두 말은 언뜻 다른 듯하지만, 그 안에는 존재의 수용이라는 공통된 의미가 있다. 즉, 감사는 타인을 인정하는 동시에, 나 자신을 자연 속 일부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산행 중에 불어오는 바람과 억새의 흔들림 속에서 나는 이 언어의 원형을 느꼈다. 산이 곰처럼 우리를 품고, 우리는 그 품 안에서 감사의 말을 배운다. “고맙습니다.”는 단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숨결이 맞닿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마음의 언어다.
언어는 단지 문법의 규칙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문장 문법성 판단을 위한 기초 자료 구축」 보고서에서는 문법이란 ‘언어의 수용성, 즉 사람들이 실제로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문장 형태’로 정의된다. 이 정의를 산행에 빗대어 보면, 자연의 언어는 문법이 아닌 조화와 균형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가 산을 오르며 느끼는 리듬 - 발걸음, 숨결, 바람, 나뭇잎의 흔들림 - 이 모두가 ‘고맙습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문법적으로는 단순한 감사 표현이지만, 생태적으로는 공존의 선언이 된다.
가을의 산은 말이 없다. 하지만 나무와 돌, 흙과 하늘은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고맙습니다’의 뿌리이다. 우리가 그 마음을 잃지 않는 한, 언어는 죽지 않는다.
웅석산을 오르며 나는 언어의 근원을 다시 배웠다. ‘고맙습니다’는 단지 예의 바른 말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하는 선언이다. 자연에게,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다. 산은 말없이 가르친다. 감사함을 잃은 인간은 결국 자신을 잃는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