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리에 취한 심판자, 하나님의 분노를 부르다
- 오뎃 선지자가 전한 정의의 경고
역대하 27장부터 28장은 두 왕, 요담과 아하스(웃시야로 언급된 경우)의 대조를 통해 인간의 영적 태도가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교만을 보며 겸손을 배운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신중하게 행했고, 그 결과 “점점 강성해졌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하스는 이방 신을 섬기며 악을 행했고, 하나님은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들어 유다를 치셨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사용하신 이스라엘조차 자신들이 ‘심판의 도구’라는 사실을 잊고 승리에 도취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온다.
유다는 아하스의 불신앙과 우상숭배로 인해 무너졌다.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공격하자 유다는 큰 피해를 입었다. 북왕국의 베가는 유다의 용사 12만 명을 죽이고, 10만 명의 포로를 사마리아로 끌고 갔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심판을 ‘전쟁의 승리’로 착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승자’의 편에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정의의 편에 계신다. 승리를 주신 이유가 교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임을 깨닫지 못하면 승리는 곧 심판의 씨앗이 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선지자 오뎃이다. 그는 이스라엘 군사들 앞에 서서 외쳤다.
“너희가 승리한 것은 하나님이 유다의 죄를 심판하셨기 때문이지, 너희가 의로워서가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동족을 포로로 삼으려 하느냐?”
이 말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신학적 선언이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사용해 다른 민족을 심판하시지만, 그 도구가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잔혹해지면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 경고는 오늘날에도 통한다. 권력을 쥔 자가 정의를 잃을 때, 그 힘은 곧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오뎃의 경고를 들은 에브라임 자손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찢고 행동했다.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부상자에게 기름을 발라주고, 약한 자를 나귀에 태워 예리고 근처로 돌려보냈다. 이 장면은 성경 전체에서도 드물게 나타나는 감동적인 회복의 드라마다. 심판과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손길을 통해 실현된다.
그들은 오뎃의 말을 단순히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되었다. 이들의 순종이 북왕국 전체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잠시 멈추게 했다.
이 사건은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교만보다 크며,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죄보다 깊다.”
북왕국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받았지만, 그 이상을 넘자 도리어 하나님의 분노를 받았다.
오늘의 교회와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누리는 성공과 권력은 하나님이 맡기신 ‘심판의 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만과 독선으로 변질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새로운 심판의 대상이 된다.
진정한 신앙은 승리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겸손이다.
오뎃의 외침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말한다.
“정의 없는 승리는 결국 패배다. 그러나 긍휼의 행동은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