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문장
— 관계의 온도를 회복하는 문학적 공간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인생은 뒤돌아볼 때만 이해되지만, 살아갈 때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인간의 고통과 회복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힐링’이라는 단어에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그 단어가 너무 쉽게 소비되고, 너무 빠르게 상처를 봉합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은 그런 조급함에 저항하는 예술이다.
작가들은 상처를 덮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에 빛을 비추고, 들여다보게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문장은 바로 이 문학의 본질에 가깝다.
문학은 독자에게 “얼마나 아팠냐”가 아니라 “그 아픔 속에서도 당신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이 문학이 주는 ‘조용한 위로’의 형태다.
키에르케고르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절망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희망을 두는 데서 비롯된다.”
이 문장은 힐링소설이 품어야 할 윤리적 기준을 제시한다.
희망을 강요하는 이야기는 결국 또 다른 절망을 낳는다.
진정한 위로는 독자에게 ‘회복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자신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서 머물게 해준다.
이런 서사는 단순히 감정을 치유하는 것을 넘어, ‘느끼는 자유’를 돌려준다.
문학적 위로는 완치가 아니라 공존이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독자는 비로소 자신에게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되찾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은 거리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문장은 문학이 다루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낸다.
우리는 가까울수록 상처받고, 멀어질수록 그리워한다.
문학은 이 아이러니를 통해 관계의 온도를 측정한다.
힐링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완벽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해하고, 엇갈리고, 결국에는 다가서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가 남아 있는 관계’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
문학은 관계의 결핍을 결함이 아닌 ‘존재의 간격’으로 재정의한다.
그 간격 속에서 온도는 회복되고, 사랑은 강요가 아닌 이해로 변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은 절망 중에서도 가장 깊은 절망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감정의 진실을 외면한 채 ‘괜찮은 척’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뼈아프게 다가온다.
소설은 그런 자기기만의 껍질을 벗겨내는 공간이다.
문학은 감정을 연출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정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예술이다.
독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며,
결국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임을 다시 받아들인다.
그 수용의 순간, 비로소 진짜 힐링이 시작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문장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수용하는 선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신 앞에서 홀로 서야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문학이 하는 일과도 같다.
문학은 독자를 혼자 세워두고, 스스로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낀다.
문학은 희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나’를 인정하게 만든다.
그것이 문학이 만들어내는 진짜 힐링의 온도이며,
우리 모두가 여전히 이 불완전한 세상을 견디게 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