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종으로 시작해 교만으로 무너진 왕, 아마샤의 비극: 역대하가 전하는 신앙의 경고
아마샤는 남유다의 제9대 왕으로, 그의 통치는 정의와 신앙의 균형 속에서 시작되었다. 부친 요아스를 암살한 신하들을 처단하면서도 그들의 자녀는 죽이지 않았다. 이는 모세 율법(신명기 24:16)에 근거한 결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당시 권력 유지와 보복이 일상화된 왕권 사회에서 이러한 선택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판단하는 지도자였다. 이러한 초기의 아마샤는 신앙과 통치가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왕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신앙은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다’는 성경의 원리가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절실한지를 곧 보여주게 된다.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을 앞두고 군사력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북이스라엘에서 10만 명의 용병을 고용했다. 은 백 달란트라는 막대한 금액이 들었지만, 그는 승리를 위해선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역대하 25:7)고 경고하셨다.
아마샤는 처음에는 난처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용병들을 돌려보냈다. 그로 인한 경제적 손해와 명예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적 결단을 내렸다. 그 결과, 에돔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순간은 ‘순종이 곧 능력’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러나 승리 후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이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의 신상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자신이 경배하고 분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승리했지만 그 승리의 결과물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하나님은 다시 선지자를 보내 “네가 어찌하여 네 손에 구원하지 못한 신들을 찾느냐”라고 책망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마샤는 선지자를 조롱하며 “네가 나를 위한 모사냐? 잠잠하라”라고 말하며 오히려 그를 억압했다.
이 장면은 신앙의 가장 큰 위기가 ‘고난 중’이 아니라 ‘승리 후’에 찾아온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믿음이 실용적인 계산에 의해 유지될 때, 상황이 바뀌면 신앙도 쉽게 무너진다. 아마샤의 교만은 곧 영적 타락의 문을 열었다.
교만으로 가득 찬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에게 전쟁을 도전했다. 요아스는 비유를 들어 “네가 가시나무인데, 백향목에게 시비를 건다”며 그 무모함을 경고했지만, 아마샤는 듣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유다는 대패했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으며, 성전의 금은보화가 탈취당했다. 왕 자신도 포로로 끌려갔다가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왔지만, 끝내 백성들의 반역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의 인생은 순종으로 시작했으나 교만으로 마감된 신앙의 전형이었다. 이는 오늘날 신앙인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처음의 믿음이 아무리 순수해도, 그것이 교만과 자기확신으로 변질되면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아마샤의 비극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앙의 실용화’와 ‘자기 의존의 교만’이 어떻게 사람을 무너뜨리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아마샤의 인생은 신앙의 출발점이 아니라 ‘지속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처음의 순종이 영원한 축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끝까지 하나님 중심의 겸손을 지켜야 한다.
교만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신앙을 자기 도구로 전락시킨다. 하나님께 순종했던 아마샤가 우상을 섬기고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되, 자신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을 잃는 순간, 순종은 의미를 잃는다.
오늘의 신앙이 내일의 교만으로 변하지 않도록, 아마샤의 비극은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