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 시절의 징크스
어린 시절, 내겐 이상한 징크스가 있었다. “쓰레기차를 보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고, 똥차(분뇨차)를 보면 하루 종일 재수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하루는 등굣길에 쓰레기차를 보았는데, 그날 오후 농구를 하다 손가락이 삐끗했다.
며칠간 고생하며 스스로 다짐했다. “역시 쓰레기차를 보면 안 되는 거였어.” 며칠 뒤에는 학교 청소 시간, 운동장에 들어온 쓰레기차를 본 날이었다. 교실 바닥에 왁스를 바르다 미끄러지며 넘어졌고, 무릎에 가시가 박혔다. 그때부터였다. 쓰레기차만 보면 괜히 불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반대로 믿었던 행운의 신호
흥미롭게도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똥차를 보면 이상하게 좋은 일이 생겼다. 보이스카우트 체육대회에서 자유투 1등을 했던 날에도, 시골 중학교 대표로 나가 화성시 대회에서 우승한 날에도 경기장 가는 길에 분뇨차를 보았다.
어린 마음에 그 차를 ‘행운의 신호’처럼 여겼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내게 ‘쓰레기차는 불운’, ‘똥차는 행운’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굳어졌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때때로 합리적 근거가 없어도 오랫동안 신념처럼 남는다.
징크스의 붕괴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캠퍼스 내를 지나던 쓰레기차를 보고 문득 그 징크스가 떠올랐다. “오늘은 또 재수 없는 일이 생기겠군.” 그러나 하루를 마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도로에서 분뇨차를 보고 복권을 샀지만, 결과는 꽝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결국 행운과 불운은 차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었구나.” 그 이후로 징크스는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 쓰레기차를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똥차를 봐도 기대하지 않았다. 결국 운이 아니라 태도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사회적 시선과의 거리
어린 시절의 징크스는 개인의 착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사회의 단면을 닮아 있었다. ‘더럽다’거나 ‘냄새난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일을 낮게 평가하는 시선. 그러나 우리가 깨끗한 거리를 걸을 수 있는 건 그분들의 노동 덕분이다.
쓰레기차와 분뇨차는 불쾌함의 상징이 아니라 도시의 건강을 지키는 필수 시스템이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이제는 그 차량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감사한다. 누군가의 땀과 수고 덕분에 우리가 쾌적한 일상을 누린다.
함께 던지는 질문
우리는 자주 외부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규정한다. “오늘은 운이 나빠.” “이번 주는 되는 일이 없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날의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해석하는 내 태도다.
나는 불운을 핑계로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작은 계기에서도 배움을 찾는가. 결국 행운도 불운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징크스가 아니라 나의 시선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내 앞을 지나가던 쓰레기차를 보며 어린 시절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는 미소가 먼저 지어진다. 그 차를 재수 없는 존재로 보던 과거의 내가 부끄럽다. 지금은 깨끗함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삶의 행운과 불운은 어떤 차를 만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깨끗함을 만드는 일처럼, 나의 생각도 매일 조금씩 정화되어야 한다.
✍ ‘보통의가치’ 뉴스는 작은 일상을 기록하며, 우리 사회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치를 전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