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쁘다 바뻐! 학교 과제와 자격증 준비, 야근과 사이드 잡,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채팅과 릴스, 그리고 멈추지 않는 알림 속에서 산다. 주말이 오면 몸은 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금요일 밤 늦게 먹은 치킨과 토요일 새벽까지 본 영상이 일요일 아침까지 따라온다. 그래서, 예배당 의자에 앉는 순간, 안전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몸은 ‘지금이야말로 갚아야 할 잠이다’라고 선언한다. 나는 절대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단지, 수면이 부족한 사람이다.
일요일 아침,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내 눈꺼풀이다. 주중 내내 알람 소리에 기계처럼 몸을 일으켰던 반작용일까. 이상하게도 예배당 그 부드러운 의자에만 앉으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졸음의 심연에 빠져든다. 설교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목사님의 음성은 아득한 자장가처럼 멀어지고, 나는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잠과의 전쟁을 치른다. 죄책감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럴까. 내 믿음이 이것밖에 안 되나.’
그러나 이것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전투가 아니다. 내 옆자리에서, 앞자리에서, 수많은 젊은 영혼이 나와 같은 전쟁을 묵묵히 치르고 있다.
나는 흔히 이 현상을 단순한 ‘피곤’ 탓으로 돌려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10대, 20대, 30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수면부족’을 운명처럼 짊어지는 일이다. 밤늦도록 이어지는 과제와 스펙 쌓기, 퇴근 후에도 끝나지 않는 업무 연락, 알고리즘이 이끄는 무한한 스크롤의 세계.
나의 뇌는 단 한 순간도 제대로 쉬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그러니, 뇌가 유일하게 안전하고 평온한 안식처로 인식하는 예배당에서, 그동안의 모든 빚을 청산하려는 듯 ‘셧다운’에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생리 현상이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는 성경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의 연약한 실존을 꿰뚫는 정확한 진단이다.
내가 졸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설교가 내 깊은 곳을 건드릴 때, 마음이 방어하기 시작한다. 미뤄 둔 과제, 관계에서의 미안함, 스스로에게 화가 난 기억이 꿈틀거릴 때, 뇌는 ‘잠깐 꺼짐’ 모드를 눌러 버린다. 졸음은 도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일 때가 많다. 부끄러움이나 불안이 벽처럼 다가올 때, 마음은 부드러운 안개를 만들어 자신을 숨긴다.
사실, 나는 나쁜 신자가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정죄하지 않고 나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으신다.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이시리라”(엡 5:14)라는 말씀은 절대 호통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구조 신호이다.
그리고, 나는 스크린 세대이다. 3초마다 바뀌는 영상, 즉각적인 좋아요, 수시로 반짝이는 알림에 길들여진 주의력은 느리고 깊은 리듬을 ‘지루함’으로 오해한다. 설교는 느려서 더는 못 기다린다. 나의 뇌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훈련 방향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재미없음’이 문제가 아니라 ‘집중근육’이 약해진 것이다. 집중은 재능이 아니라 훈련이다. 훈련 없이는 좋은 말씀도 내게는 언제나 백색 소음이 된다.
가끔은 설교가 ‘우리 얘기’처럼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 강단의 단어가 생활의 단어와 연결되지 않으면, 뇌는 자동으로 ‘무관’ 딱지를 붙이고 스위치를 내린다. 반대로 월세, 성적, 커리어, 연애, 부모와의 갈등, 마음건강의 현실에 닿는 순간, 졸던 눈이 뜨인다. 복음은 추상 이론이 아니라 오늘의 거리에서 들리는 ‘좋은 소식’이다. 연결은 깨어남을 만든다. 사람은 ‘자기 이름’을 들을 때 깨어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지 육체의 피로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더 깊은 심리적, 영적 기제가 작동한다. 현대 사회는 우리를 ‘도파민의 노예’로 만들었다. 15초짜리 숏폼 영상, ‘좋아요’ 알림, 실시간으로 터지는 이슈들. 우리는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보상에 중독되어 있다. 이런 뇌에게 30분간 이어지는 설교는 견디기 힘든 ‘지루함’으로 해석된다. 말씀이라는 깊고 느린 빵을 음미하기보다, 세상의 빠르고 자극적인 사탕을 갈망하도록 우리의 미각이 변해버린 것이다.
더 솔직해져야 한다. 때로 설교는 내 영혼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가장 아픈 곳을 정면으로 겨눈다. ‘거룩’, ‘회개’, ‘헌신’이라는 단어가 선포될 때, 나는 주중에 저질렀던 작은 거짓말, 마음속에 품었던 미움, 세상과 타협했던 비겁함을 떠올린다. 그 말씀이 내 삶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 나는 수치심과 불편함을 느낀다.
나의 무의식은 이 고통스러운 자기 직면을 피하기 위해 가장 원초적인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그것이 바로 ‘잠’이다. 눈을 감고 의식을 차단함으로써, 나는 불편한 진리로부터 도망친다. 어떤 졸음은 나태가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의 필사적인 자기 보호 전략이다.
결정적으로, 말씀이 내 삶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을 때 나는 졸게 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당장 다음 달 월세 걱정과 취업의 불안함, 깨져버린 관계의 고통으로 가득한 내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길을 잃는다. 말씀이 저 높은 강단 위에서만 맴돌고, 나의 치열한 삶의 현관문조차 두드리지 못할 때,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된다. 연결되지 않으면, 마음은 떠난다. 영혼은 자기 이름이 불릴 때 깨어나는 법이다. 나의 이야기, 바로 지금 나의 고통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가 들릴 때, 비로소 나의 졸던 눈은 뜨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졸음 앞에서 영원히 패배자로 남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바로, 그 졸음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더는 ‘잠들지 않으려는 나’와 싸우는 것을 멈추고, ‘잠들 수밖에 없는 나’를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가장 용기 있는 믿음의 시작이다. “주님, 저는 피곤합니다. 제 영혼은 지쳐있고, 당신의 말씀은 때로 너무 아프고 멀게 느껴집니다. 잠으로 도망치고 싶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 귀를 열고, 제 마음을 깨워주십시오.”
나의 싸움은 눈꺼풀과의 싸움이 아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시는 은혜를 향한 갈망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약속은, 완벽하게 준비된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지쳐 쓰러져 잠든 나를 향한 초청이다. 나의 졸음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쉼이, 진정한 안식이, 그리고, 나의 영혼을 깨울 생명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이다.
그러니, 설교만 들으면 졸리는 나와 같은 친구들이여, 이제, 모든 핑게의 자리를 기도의 자리로 바꾸어 보자. 꾸벅이는 졸음의 순간을, 우리 영혼이 주님을 향해 보내는 간절한 구조 신호로 여기자. 육신은 잠들지라도, 우리 영혼은 깨어나길 갈망하고 있다. 그 작은 갈망의 불씨를 붙들고, 다시 말씀 앞에 나아가 보자. 이제, 더는 졸음과 싸우지 말고, 우리 영혼을 깨울 진리와 씨름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