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고통의 시작, 몸이 내는 첫 목소리
통증은 언제나 불쑥 찾아온다. 누군가에게는 허리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깨의 묵직한 압박감으로. 우리는 그때마다 “아프다”라는 말로 반응한다. 그러나 그 짧은 단어 뒤에는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다. 통증은 단순히 ‘불편함’이 아니라, 신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는 생존의 언어다.
의학적으로 통증은 손상이나 염증을 알리는 생리적 반응이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보면 통증은 더 깊은 대화다. 몸이 마음에게 “지금,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라고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다. 예를 들어, 만성 두통은 단순한 혈관 수축이 아니라 장기간의 스트레스, 수면 부족, 심리적 압박의 결과일 수 있다. 몸은 말하지 못하지만, 통증이라는 언어로 스스로의 균형이 깨졌음을 표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언어를 우리는 너무 자주 무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통증을 불편함으로만 여긴 채 즉각적인 해소를 원한다. 통증이 우리 몸이 보내는 첫 목소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그것을 ‘침묵시키는 것’이 치료라고 믿는다. 하지만 진짜 치료는 그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2. 진통제로 가려진 신호, 우리가 놓치는 경고음
현대 사회에서 통증은 일종의 ‘고장’처럼 취급된다. ‘고통 없이 일하고, 고통 없이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통증은 곧 비효율의 상징이 된다. 우리는 두통약, 진통제, 마사지, 카페인으로 통증을 봉합한다. 그러나 봉합은 치료가 아니다.
의사들은 종종 말한다. “통증은 몸의 알람이다.” 그 알람을 계속 꺼버리면, 언젠가는 경고등조차 작동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는 ‘진통제 의존 사회’를 경고하며, 만성 통증의 조기 대응보다 약물 의존이 신체 기능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통증의 근원을 탐구하기보다 그것을 ‘없애는 일’에 집중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통증은 우리의 ‘삶의 속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몸이 잠시 멈추자고 신호를 보낼 때, 우리는 그 신호를 ‘게으름’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진짜 게으름은 통증을 무시하는 것이다.
통증은 몸이 보내는 언어이자, 자기 돌봄의 시작이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스스로의 언어를 부정하는 행위다.

3. 통증의 사회학: ‘아프면 참아라’라는 문화의 덫
“남자는 아프다고 하지 마라.”
“참아야 강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자라난 이들에게 익숙한 문장들이다. 통증을 표현하는 것이 곧 약함의 증거로 여겨지는 문화. 그러나 이런 사회적 코드가 개인의 신체 감각을 얼마나 왜곡시키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이른바 ‘참음의 미덕’은 개인의 몸을 침묵시키는 폭력으로 작용한다. 특히 여성과 노인, 노동자 집단에서 그 경향은 뚜렷하다. 생리통, 허리 통증, 근골격계 질환 등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가볍게 여겨지고, 오히려 통증을 견디는 능력이 덕목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고통을 ‘참는’ 사회는 결국 병을 ‘만드는’ 사회가 된다.
사회학자 엘렌 스카리가 『고통과 인간의 언어(The Body in Pain)』에서 말했듯, 고통은 인간의 언어 구조를 붕괴시킨다. 극심한 통증에 처한 사람은 말 대신 신음으로 반응한다. 그 순간 그는 언어를 잃은 존재가 된다. 우리가 통증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할수록, 사회는 더 많은 사람의 언어를 침묵시키는 셈이다.
이제는 통증을 다시 ‘표현의 언어’로 복원해야 한다. 아프다는 말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돌보는 능력의 표현이다.
몸의 언어를 해독하는 법: 통증을 대화로 바꾸기
통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통증은 원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방향을 수정하라는 ‘제안’이다. 예를 들어, 허리 통증은 단순한 자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와 긴장, 혹은 오래된 감정적 부담이 신체에 축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최근 심리신체의학(psychosomatic medicine)에서는 ‘감정이 몸을 통해 표현된다’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억눌린 감정은 신체적 통증으로 전이될 수 있으며, 실제로 우울증 환자의 60% 이상이 신체 통증을 호소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즉, 통증은 마음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언어를 해독할 수 있을까? 우선 ‘관찰’이 필요하다. 통증의 위치, 강도, 발생 시점, 감정의 변화 등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진단이 아니라 ‘몸과의 대화 일지’가 된다. 두 번째로 ‘멈춤’이 필요하다. 몸이 보낸 신호를 듣기 위해선, 잠시 멈춰야 한다. 속도를 줄이는 순간, 몸의 작은 신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수용’이 필요하다. 통증을 적으로 보지 않고, 몸이 전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통증을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다.
통증을 들을 수 있는 용기
통증은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몸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신호다. 통증이 없다면 우리는 상처를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망가뜨릴 것이다. 그러니 통증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언어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 언어를 듣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통제를 삼키기 전에, 잠시 귀 기울여 보자. 당신의 몸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몸이 보내는 정상적인 신호인 통증 두려워하지 말고 알아가는 용기를 가져보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