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늘었지만, 기쁨은 줄었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한 가치는 희미해졌다. 돈을 버는 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은 잊어버렸고,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가슴 아픈 현실이자 깊은 모순이다.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진보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우리 내면의 공허함과 불안은 오히려 더 커져만 간다. 우리의 영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 왜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지조차 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딜레마에 대해 한 목회자의 깊은 성찰은 우리가 놓치고 있던 문제의 본질을 짚어준다. 그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이 단순히 외부 환경이나 제도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통찰은 문제의 원인이 우리가 생각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있으며, 진정한 변화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시작된다고 이야기한다.
진짜 문제는 '바깥'이 아닌 '안'에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적인 해결책을 찾아왔다. 공산주의 같은 이념운동, 세계 평화주의 운동, 군사적인 무력, 외교적 수완, 심지어 종교라는 보기 좋은 허울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없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은 한때 세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 시도가 어떤 비극으로 귀결되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제1, 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은 인간의 이성과 선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증명했다. 환경을 바꾸고, 제도를 개선하고,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는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선진국의 살인 범죄 비율이 후진국의 그것보다 더 낮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핵심은 이것이다. 진짜 문제는 환경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 인간 안에 내재된 죄성 그 자체에 있다. 역사의 교훈은 분명하다. 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는 결국 죄인들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내면의 문제를 안고 있는 신앙인은 세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세상과 단절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신앙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섞이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신앙인들끼리만 모여 순수함을 지켜야 하는가? 성경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이 말의 핵심은 고립이 아닌 적극적인 '섞임'에 있다.
소금은 부패를 막기 위해 음식물 속에 녹아들어야 하고, 빛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그 한가운데를 비춰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부름받았다. 세속적인 문화에 물드는 것을 두려워하며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부패를 막고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문화를 전하고 세상의 부패를 막고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라는 의미에서였다.
이 역할은 단순히 사회적 의무를 넘어선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결국 이 땅에 에덴동산의 축복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근본적인 영적 과제를 던진다. '교회에 의해 세상이 변하느냐 아니면 세상에 의해 교회가 변하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이 막중한 과제는 어떻게 가능한가? 단순히 의지를 다지고 선한 행동을 몇 번 더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면, 우리 존재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일까?
진정한 변화는 '개선'이 아니라 '완전한 리셋'이다
세상이 변하려면 사람이 변해야 하고, 사람이 변하려면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의지력으로 나쁜 습관을 고치거나 선행을 쌓는 '개선'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완전한 리셋에 가깝다.
이는 한 사람의 운영체제(OS)를 완전히 새로 설치하는 것과 같다. 과거의 낡은 생각과 욕망을 따르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듭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교회는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하늘의 평화와 자유, 기쁨을 미리 보여주는 '천국 문화의 축소판'이 되어야 한다. 이 변화는 단순히 지식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그의 '몸'이었던 것처럼, 이 변화는 우리의 삶 전체를 요구한다.
성경 에베소서 4장 22-24절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권면을 담고 있으며, 이는 유혹의 욕심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하여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의미한다. 옛 생활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새 사람이 되라는 이 메시지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내면의 변화와 새로운 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언제나 소망은 있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깊은 공허함과 끊이지 않는 문제들은, 해결책이 외부적인 처방에 있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건물은 더 높이 올릴 수 있고 기술은 더 발전하겠지만, 그것이 우리 내면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 안에 있으며, 진정한 해답 역시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희망적인 것은, 이 내면의 영적 쇄신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는 믿음이다. 끝이 없어 보이는 영적 전쟁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싶은 변화가 새로운 정책이나 기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워진 사람,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면 어떨까?
결국 승리하신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조금 더 기도하고, 조금 더 수고하고, 조금 더 겸손하며, 조금 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을 때, 진정한 승리가 우리를 통해 세상에 선포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