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소풍을 마친 순례자의 보고서-시인 천상병, 이 시대의 방황하는 영혼에게 삶의 목적을 묻다

-천상병의 시 세계에 나타난 기독교적 신앙 구조.

-귀천에 나타난 부활의 소망, 행복에 나타난 은총의 수용.

-십자가를 짊어진 시인의 삶, 교파를 넘어선 복음적 인간.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지금 그대의 삶은 어떠한가.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문득 밀려오는 공허함과 싸우고 있지는 않은가. ‘좋아요’ 숫자와 팔로워 수로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숨 가쁘게 스펙을 쌓아 올리는 경주에 지쳐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우리에게 더 높이, 더 빨리, 더 많이 소유하라고 속삭인다. 그 끝없는 경주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고,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여기,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가장 처절한 실패자였으나,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에 가장 투명한 답을 남기고 떠난 한 사람이 있다. 가난과 병, 억울한 옥살이와 세상의 오해 속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단 한 순간도 불행에 잠식당하지 않았던 시인, 천상병.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가 쌓아 올리는 그 모든 것은, 과연 그대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그의 대표작 「귀천(歸天)」은 한 편의 시가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께 제출하는 최종 보고서와 같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에게 ‘삶’이 숙제와 시험의 연속이라면, 그에게 삶은 ‘소풍’이었다. 우리에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자 가장 큰 두려움이라면, 그에게 죽음은 ‘귀향’, 곧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설렘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관점의 전환인가.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한 본향을 향한 짧은 여정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소풍 온 아이가 잠시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자기 인생을 걸지 않듯이, 그는 가난도, 고통도, 세상의 평판도 그저 소풍길에 만난 스쳐 가는 풍경으로 여겼다.

 

이것은 맹목적인 현실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명징한 현실 인식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한복음 14:2).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빌립보서 3:20). 천상병은 이 진리를 교리가 아닌 삶으로 살아냈다. 그의 시는 이 땅의 성공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는 자의 평안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조건 속에서도 “나는 행복하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시 「행복」은 단순한 자기 최면이나 긍정의 힘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소유’가 아닌 ‘소속’에서 오는 행복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믿는가. 안정된 직장, 넓은 아파트, 최신형 자동차, 그리고 타인의 부러움 섞인 시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바치지만, 막상 손에 쥐고 나면 또 다른 갈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천상병의 행복은 조건에 매여 있지 않았다. 그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음’ 그 자체였다. 굶주릴 때도, 병들었을 때도, 오해받을 때도 그는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존재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세상이 나를 증명해 줄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천상병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산상수훈이었다. 그의 시는 세상의 번영신학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고발하고, 오직 은혜로만 살아가는 삶, 하나님의 임재만으로 충분한 삶이야말로 진짜 ‘복’임을 웅변한다.

 

그의 자유 또한 세상의 자유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시 「새」에서 그는 육체의 감옥을 넘어 영혼의 비상을 꿈꾼다. 이 ‘새’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우리를 모든 얽매임에서 풀어주시는 성령의 상징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우리가 갈망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 간섭받지 않을 자유, 마음껏 소비할 자유. 그러나 종종 그 자유는 더 큰 중독과 방종의 감옥으로 우리를 이끈다. 천상병이 노래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였다. 그는 좁은 독방에서도 하늘을 노래했고, 차가운 병상에서도 창조주를 찬양했다. 어떤 외부의 조건도 그의 영혼을 구속하지 못했다. 세상이 그를 미쳤다고 조롱할 때, 그의 영혼은 누구보다 맑게 깨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다.

 

그의 삶 전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저주로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땅에서 철저히 나그네로 살았다(히브리서 11:13). 나그네는 땅에 집을 짓지 않는다. 짐을 최소화하고,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한다. 천상병에게 고통은 영원한 본향을 더욱 사모하게 만드는 나침반이었고,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하는 통로였다. 그는 고통의 언어를 감사의 언어로, 절망의 현실을 소망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믿음의 연금술사였다.

 

천상병의 신앙은 특정 교파의 틀에 갇히지 않았다.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의 회고처럼, 그는 “하느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신앙은 형식이 아니라 본질이었고, 이론이 아니라 관계였다. 그의 시가 기도였고, 그의 삶이 예배였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 글을 읽는 청년이여, 그대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천상병의 삶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준다.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간 한 순례자의 아름다운 보고서다. 그는 온몸으로 증명했다. 인생의 성공은 이 땅에서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집’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잊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라고.

 

우리의 하루하루가 그저 스펙 쌓기와 생존 경쟁으로 소진되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천상병의 삶과 시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한다. 돌아오라고, 나의 집에는 너를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다고. 이 세상 소풍은 언젠가 끝나며, 그 끝에는 두려움이 아닌 가장 따뜻한 품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대의 이력서는 지금, 하늘과 땅 중 어느 곳을 향해 쓰여지고 있는가?

 

[*참고: 천상병(1930~1993)은 한국 현대시의 독특한 신비주의자이자, 영혼의 나그네로 불린다. 그의 생애는 가난, 질병, 투옥, 오해, 그리고 사회적 소외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그의 시는 그 어떤 절망의 냄새도 품지 않았다.오히려 그는 삶의 고통 속에서 ‘하늘을 향한 영혼의 순례’를 노래한 성자적 시인이었다. 천상병의 문학적 핵심은 종교적 체험이다. 그는 태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지녔고, 세례명은 “시몬(Simon)”이었다. 그러나 생애 후반에는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개신교 예배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교파적 이중성은 그가 형식적 교리를 초월하여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를 중심으로 신앙을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교리를 말하지 않지만, 복음을 산문보다 더 깊이 말한다.]

 

 

작성 2025.10.07 02:19 수정 2025.11.02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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