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디지털 시대, 왜 청계천의 책방들은 문을 닫는가?”

종이의 향기에서 데이터의 빛으로 — 변해버린 독서의 풍경

도시개발과 기억의 퇴장...청계천 헌책방 골목의 마지막 페이지

청계천 4가, 을지로 5가 부근. 낡은 간판이 매달린 헌책방 골목은 서울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장소였다. 한때는 출판사 직원과 대학생, 논문 쓰는 연구자들로 붐볐던 거리였지만, 지금은 셔터가 내려앉은 책방이 절반을 넘는다. 오래된 책 냄새 대신 커피 향과 소음이 골목을 메운다.

 

책방 사장님은 작년에 문 닫았어요. 요즘엔 인터넷으로 다 주문하니까요. 인근에서 20년 넘게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장은 짧은 말만 남기고 다른 업종으로 떠났다.

 

서울의 헌책방은 이제 ‘추억의 풍경’이 됐다. 디지털 플랫폼이 책을 대신하고, 전자문서가 종이를 밀어내는 시대다. 하지만 헌책방의 사라짐은 단순한 산업 변화가 아니라, 한 도시의 기억과 문화가 조용히 퇴장하는 사건이다.


[사진: 쳥계천 헌 책방의 모습, 라이프타임뉴스]

청계천 일대의 헌책방 거리는 1960~70년대에 형성됐다. 대학가와 출판사가 가까워 학자와 학생, 기자들이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헌책방은 ‘지식의 교환소’였다. 책값이 비쌌던 시절, 사람들은 책을 사고팔며 시대의 사유를 나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임대료가 급등했고,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이 중고 거래 시장을 장악했다. 교보문고, 알라딘, YES24와 같은 플랫폼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클릭 한 번으로 ‘중고서점’을 경험했다. 헌책방의 공간적 매력은 빠르게 잊혔다.

 

2020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은 그 마지막 타격이었다. 발길이 끊기고, 책방 운영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결국 청계천 일대의 헌책방은 40여 곳에서 현재 10여 곳 남짓으로 줄었다.


 

‘책을 넘길 때의 감촉이 좋아서 헌책방을 다녔어요.’ 20대 독자 김모 씨의 말이다. 디지털 세대인 그는 전자책을 즐겨 보지만, “헌책방은 단순한 소비 공간이 아니라 기억의 장소였다”고 덧붙인다.

 

문화연구자들은 헌책방의 쇠퇴를 ‘정보 소비의 구조적 전환’으로 본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독서 시대에는 책의 내용보다 ‘접근성’과 ‘속도’가 핵심 가치로 떠오른다” “이 변화는 지식의 민주화를 촉진했지만, 동시에 문화적 심도를 약화시켰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오프라인 서점 수는 절반 이하로 줄었고, 그중 헌책방의 감소율은 80%에 달한다. 반면 전자책과 온라인 콘텐츠의 소비량은 같은 기간 300% 이상 증가했다. 정보는 더 빨라졌지만, 기억은 더 짧아진 사회가 된 것이다.


 

청계천 헌책방의 의미는 단지 ‘책을 파는 가게’에 그치지 않는다. 그곳은 시대를 아카이빙하는 비공식 기록 보관소였다. 절판된 시집, 학자의 메모가 남은 교재, 사인본, 손때 묻은 낱장 속에는 한 세대의 사유와 정서가 깃들어 있다.

 

서울시 A문화재단이 2023년에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헌책방 골목을 방문한 시민의 68%가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을 보기 위해서’ 방문했다”고 답했다.


도시의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로서의 역할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가 시장 논리에 밀리면서 공간은 속수무책으로 사라지고 있다. 지식의 전달이 데이터로 대체된 시대, ‘책을 읽는 경험’이 아니라 ‘책을 스크롤하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도시개발 논리와 문화적 지속성은 언제나 충돌한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진정한 문화도시로 남으려면, 청계천의 책방 같은 작은 기억의 공간을 지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디지털은 편리함을 주었지만, 물성의 세계를 빼앗았다. 종이의 질감, 책장 사이에 끼워둔 영수증, 주인의 손때가 묻은 메모. 이런 사소한 흔적들은 데이터로 저장되지 않는다.

 

청계천의 헌책방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낡은 가게 몇 곳이 문을 닫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기억이 삭제되는 과정이며, 우리가 ‘시간을 읽는 방식’이 바뀌는 일이다.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종이’ 그 자체가 아니라, 느리게 읽고, 기억하는 문화다. 청계천의 헌책방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공간을 단순한 상업구역이 아닌 ‘기억의 공공유산’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서울시는 이미 도시기억 프로젝트를 통해 옛 인쇄골목을 복원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도 그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청계천 헌책방의 기록과 스토리는 시민 모두의 자산이다.

 

 

 

 

 

 

 

작성 2025.10.04 21:38 수정 2025.10.0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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