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별의 사슬을 끊다: 형평운동의 태동
1923년 봄, 경남 진주의 작은 마을에서 울려 퍼진 한마디 외침은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시대를 깨우는 경종이었다. 당시 사회 곳곳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은 특히 백정이라는 신분적 낙인을 짊어진 이들의 삶을 옥죄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시장에서도, 심지어 죽어서 묻히는 자리에서도 차별은 이어졌다. 이 부당한 현실에 맞서 백정 출신 지식인과 청년들이 나섰다. 그들이 바로 형평운동의 불씨를 지핀 주인공들이었다.
형평운동은 단순히 한 계층의 억울함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하는 역사적 도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서 그들의 외침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운동은 한국 사회의 평등 담론을 열어젖히는 거대한 파문으로 확산됐다.
평등의 선언, 조선형평사의 외침
형평운동의 상징은 1923년 4월 1일에 창립된 조선형평사다. 창립선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이 단호한 문장은 신분제의 잔재와 사회적 차별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선언이었다.
형평사 회원들은 스스로를 차별받는 ‘백정’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으로 세우기 위해 각지에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들의 활동은 단순히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교육권을 요구하고, 사회적 편견을 깨뜨리며, 제도적 차별 철폐를 촉구했다. 당시 언론은 이들의 운동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형평운동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씨앗이 된 형평운동
형평운동은 백정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정신을 싹틔우는 토양이 됐다. 불평등을 거부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가치는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운동의 기초가 됐다.
또한 이 운동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억압 속에서 더욱 빛났다. 외세의 지배와 내부의 차별이 동시에 얽혀 있던 상황에서 형평운동은 단지 계급 해방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해방과 맞닿아 있었다. 차별 없는 사회를 향한 외침은 결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향한 길과도 연결되었다.
형평운동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헌법 속 ‘법 앞의 평등’이라는 조항은 더 늦게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가 다시 묻는 형평의 가치
100년이 지난 오늘, 형평운동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진정으로 차별 없는 사회를 이루었는가? 피부색, 출신, 성별, 장애 여부에 따라 보이지 않는 벽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가?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은 역사 속 사건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형평운동이 남긴 교훈을 잊은 셈이다.
형평운동의 불꽃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위해 계속 타올라야 한다. 그 정신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념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위한 실천이다.
형평운동은 진주라는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파급력은 전국을 넘어 오늘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선언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다. 우리가 그 정신을 기억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완성될 것이다.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진주 형평운동 기념관을 찾아보거나 관련 연구 자료를 읽어보길 권한다. 작은 관심과 학습이 역사를 현재로 불러내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