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뉴스 객원 논설위원 박금희]
차(茶)종자, 그 작고 작은 알맹이들에 담긴 큰 세계
늦여름의 다실 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microcosmos)다. 화려하지 않은 이질풀꽃이 제 빛깔을 드러내고, 빗물을 머금은 이파리들은 햇살에 반짝인다. 꽃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은 한 잔의 맑은 차향처럼 가볍고, 초록의 생기는 마치 차 한잔 속의 뜨거운 물결이 식어가듯 차분하다. 이 뜰에서의 한 잔의 차는 음료이면서도 자연을 우려내는 마음을 담고 있기도 하며, 저 들의 들꽃들은 그 마음의 거울이다.
한편 이 소박한 풍경 속에서 은근히 눈길을 끄는 것은 차나무의 열매들이다.
아직 연둣빛으로 채 여물지 않은 차종(茶種子)은 작고 투박하지만, 그 속에는 다음 해를 이어갈 생명이 잉태되어 있다. 꽃이 잠시의 계절을 알린다면, 종자는 시간을 잇는 약속이다. 오늘날 차는 흔히 ‘힐링의 상징’으로 소비되지만, 사실 차의 본질은 바로 이 씨앗에서 출발한다. 차종자들이 지닌 상징성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자못 크기만 하다.
차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꽃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씨앗이다. 차종자는 단순히 새로운 나무를 잇는 매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곧 ‘생명’과 ‘계속성’의 상징이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새로운 줄기가 돋아나는 것처럼, 삶 또한 희생과 기다림 위에서 이어진다. 이 작은 알맹이가 보여주는 질서는 우리 사회가 잊고 있는 아주 중요한 원리의 하나이리라.
차종자는 곧 삶을 밝히는 빛의 근원의 하나이자 공동체를 이어주는 매개체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겉모습으로의 화려한 차 문화에 앞서 우리가 마음에 꼭 새겨 두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씨앗이 보여주는 ‘근본의 정신’에 대한 인식 없이는 그 어떤 꽃도 오래가지 못하리라.
오늘날 차 문화는 이미지로 소비되고, 다도(茶道)는 행사의 겉치레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차종자는 묵묵히 말한다.‘겉모습보다 속을 채우라’ 작은 알맹이 속의 단단함이야말로 생명을 키우고, 공동체를 지탱하며, 문화를 뿌리내리게 한다. 그것은 차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을 비롯한 그 어느 분야에서든 씨앗의 질서를 되새기지 않는다면 사회는 꽃은 피워도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차종자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순한 농업적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작은 것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와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차종자는 말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의 삶은 무엇을 잇고 있는가. 그대의 사회는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차 문화는 자칫 피상적이기 쉬울 뿐, 그저 전통 체험의 도구나, 고급 취향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차종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작은 것을 존중하라. 근본을 잊지 말라’ 씨앗이 단단해야 나무가 자라고, 나무가 있어야 꽃이 피며, 그때서야 비로소 차 한 잔의 여백도 가능한 것이리라.
지금 우리 사회는 빠른 변화와 화려한 이미지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차종자는 묵묵히 묻는다.
‘그대는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가. 그대의 삶은 무엇을 이어가고 있으며, 또 무엇을 이어주려 하는가’이러한 질문도 지속 가는한 문화, 환경, 공동체를 이루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지 않는가.
다실 뜰의 작은 들꽃들이 삶의 소박함을 일깨운다면, 차종자는 그 소박함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다. 그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알의 알맹이 속에 숨어 있는 큰 울림,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차종자 앞에서 다시 배우는 지혜다.
그리고 이 지혜는 지역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화려한 개발과 변화보다, 전통과 문화의 작은 씨앗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하리라. 그리하여 지역의 축제, 옛길과 풍습, 사라져가는 차밭과 다실의 기억들 역시 하나하나 다 소중한 씨앗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가 심고 가꾼 작은 씨앗이 훗날 이 지역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옛 혼례에는 함 속에 오낭채(五囊菜)라 하여 다섯 가지 씨앗을 담았다. 부부가 한 땅에 뿌리내리고 대를 이어가라는 염원을 담은 풍습이다. 씨앗은 흩날릴 때는 아무 힘이 없어 보이지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렸다 하면 이제 귀한 생명을 낳고야 말리라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저 더 나은 조건을 좇아 일터를 옮기고, 이익을 위해 관계를 갈아치우며, 그 마음의 뿌리조차 옮겨 다니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오늘의 교훈은 단순하다. 흔들림 많은 세상일수록, 더 단단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삶이 그냥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그 향기를 이 지구상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글/사진 [SF뉴스 객원 논설위원 박금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