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2025.04.04, 오전11시22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탄핵선고 결정문을 단호하게 낭독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문형배 전 재판관이다. 문형배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국회청문회(2019.04.09)에서 문형배 후보자는 모두 발언을 통해 "저는 가난한 농부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무사히 마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내게 대학교까지 장학금을 주셨지만, 내가 받은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라고 국회 청문 위원들 앞에서 밝힌 바 있었다.
윤형배 전 헌재소장 대행이 30여년 동안 법관 및 헌법재판관 생활 중 선한 영향력을 준 '김장하 선생'(이하, 선생)은 과연 어떤 삶과 철학 그리고 생활 신조를 가지신 분일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침 아내와 함께 넷플리스를 통해 전기적 영상인 다큐 영화 「어른 김장하」를 보고난 후에야 선생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큐 영화에 출연한 김주완 기자의 『줬으면 그만이지』란 책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선생에 대한 스토리는 전적으로 이 책을 기초로 서술하게 된다, 지면상, 인용 페이지는 생략한다). 김주완 기자(이하, 기자)가 선생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한 취재기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한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사회의 지표가 되는 어른들이 많이 계셨다. 종교계에서는 김수환 추기경·함세웅 신부 등(천주교), 손양원·한경직· 문익환 목사 등(기독교), 성철·법정 스님 등(불교)이 그 시대를 인도하는 어른들이 있어 정신적인 중심을 잡아주었다. 또한 의료계의 장기려 박사, 법조계의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김홍섭 판사·최대교 검사장, 정치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사회의 나침판이 되는 어른(스승)을 찾을 길이 없다.
사회와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가르침과 지혜를 구할 어른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우리는 기자의 책을 통해 선생에 대한 삶의 교훈을 찿을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의 베품의 시작은 미미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규모와 활동 영역은 두루 퍼져, 선생의 도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창대한 것이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계기는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도움과 사랑을 베푼 것이다. 기자의 책에서 밝힌 것처럼, 선생께서는 장학금 혜택을 받은 학생들에 대한 이름과 숫자를 전혀 말씀하신 적이 없다. 따라서 특은(特恩)을 입은 학생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길이 없다. 그렇지만,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하면 1,000여명이 상회할 것으로 추산한다(장학사업의 시작은,1972년,24세 때).
기자의 책을 인용하면, 선생의 장학금 특징은 은밀하게 전달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 기준으로 하되, 졸업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 예외적인 경우라도 대학원 졸업 또는 고시 합격 때까지 지속적인 지원을 원칙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 사례가 이준호 서울대 교수와 우종원 일본의 사이타마 대학교 교수 그리고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등이다. 선생은 너무 가난하여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가족의 어른이자 인생에서의 스승인 할아버지의 권면에 의해 할아버지 친구분이 운영하던 삼천포의 한약방에서 점원 생활을 시작한 것을 기화로 한약방과 인연을 맺는다.
낮에는 허드렛일을 하고, 저녁에는 머슴과 동숙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한약 관련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세 때에 지금의 한약업사 시험인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했으나, 미성년자여서 6개월 후에야 허가증을 받아 한약업을 필생의 직업으로 시작했다(1963.10,남성당 한약방). 선생은 한약업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돌보면서 거기서 번 돈으로 사회와 학생들을 위해 헌신·봉사의 삶을 사신 것이다. 1977년 진주로 옮겨 2023년 5월 폐업할 때까지 한약방을 운영하여 '아름다운 부자'(기자의 표현)가 되었다.
선생 자신을 위해서는 오래된 양복과 운동복(사모님도 선생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시려고 헌신적 삶을 동행)이 전부이다. 많은 돈을 가진 아름다운 부자였지만, 지금까지 자가용도 없이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명신고등학교 이사장일 때도 학교에 올 적에는 자전거를 타고 왔다. 물론 이사장실은 없다). 이사회 회의는 교장실을 이용했다. 이런 교육 현실을 목도한 학생들의 감동과 존경심은 지극히 자연스런 선한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단지 근검 절약하며 사는 선생의 철학과 실천일 뿐이다. 그대신 학생들을 위한 도서관과 체육관을 세워 오로지 학생들의 꿈을 실현 시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참된 스승의 마음이다.
이런 선생을 옆에서 지켜본 선생의 동창이자 친구인 최관경(전 부산대 교수) 교수는 "김장하는 이 나라에 없는 참 스승이다"라고 말한다. 선생의 대표적인 필생의 금자탑은 39세인 1982년, 재산 사회 환원 프로젝트로 고등학교 설립에 착수한 일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지역의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명신 고등학교를 세우고, 우수 교사들을 스카웃하여 좋은 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3년 기공식 때 공언한 대로, 1991년 8월에 피땀으로 키운 교육의 전당인 명신 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사회 환원)하였다. 남은 재산은 학교 장학기금으로 기부하는 결단을 내려준 것은 선생의 교육에 대한 관심의 극치를 보여준 상징이다.
진주 지역에서 선생의 따뜻한 손길과 구체적인 사랑의 수고는 국립 경상대학교 남명회관 추진위원장으로 참여해 12억 이상의 거액을 출연해 남명회관을 세워 주고, 남명 연구소에도 1억 이상을 희사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은 귀중한 시간을 쪼개 형평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활동하며, 정신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호수처럼 맑고 깊은 어른의 헌신은 사회 각 부문에 고루 미쳤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친히 초청한 중요 자리에도 (한약방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절한 선생이다. 그런데 당신의 생명같은 시간을 아껴 진주가정법률상담소 이사장으로 활동했고,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동반 자녀를 위한 보호시설인 「내일을 여는 집」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리고 진주 토종 서점인 진주문고, 지역신문인 언론,문화, 시민단체,사회, 학술, 여성·농민단체 등에 선생의 재정적 지원과 헌신적인 지지는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진보 신문의 대표적 정론지인 한겨레 창간할 때에도 주주로 참여할 정도로 선생의 사회를 향한 관심은 지대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어려움을 안고 찾아온 모든 사람이나 단체에 빈손으로 보낸 적이 없었다고 기자는 전한다.
선생은 강조하여 말한다. "사람은 담은 그릇이 있거든, 좀 덜어 내야 또 채울 수 있지". 그리고 "버렸으면 미련없이 버려야지". "줬으면 그만이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 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물질의 노예가 돼 버린 오늘의 우리들에게 새 길을 인도하는 가르침이다. 또한 평상시에도 "심상의 덕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하신다. 선생의 삶의 철학과 지조는 수제자라고 해도 무방한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의 블로그에서 적은대로, 김정하 선생의 경의로운 사표로서의 삶의 철학이 "선순환되면 공동체가 아름다워진다"는 내용으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선생의 가르침은 과연 무엇일까? 조용히 사회 변화를 추구하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피땀으로 일군 소중한 재산을 도움이 절실한 사람과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존중·배려·관용의 삶을 실천한 선생이다. 온화하고 잔잔한 미소로 내면의 향기를 발하면서,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항상 남의 말을 경청하며,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준다.
오늘 우리 사회는 머리 회전만 존재하고, 부정과 비리·갈등과 한탕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옹졸하고 초라한 분탕질 등이 난무한 세상이다. 특히 수단인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황금만능주의 사조(맘모니즘)의 가치전도,질서전도,주객전도가 팽배한 악과 비극의 시대이다. 선생은 돈을 모을 줄은 알아도, 돈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돈을 제대로 쓸줄 모르는 오늘의 우리에게 돈을 가치있고 보람되게 쓰는 지혜를 삶의 모습으로 직접 보여 주고 가르친다. 선생 덕분에 그나마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내일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희망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사람답게 사는 길을 제시한 묵언의 지혜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선생의 삶의 여정과 실천적 빛의 열매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생은 바다의 심연처럼 변함없는 베풂으로 사회에 희망과 사랑의 빛을 비춘 이 시대의 어른 그 이상이다. 김장하 선생의 가르침을 배웠다면, 나눔과 베풂(보시)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선생의 삶이 보여준 가르침을 본받게 된다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사회는 더욱 밝고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빵 조각 하나라도 이웃과 나누는 마음의 작은 실천이 사랑의 시작이다"라는 필자의 동생이 늘 강조하는 말을 떠올리며 마친다.
진송범
법학박사
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정책방송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