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시우의 백인일수 단 헤이안시대라서 일제감점기랑은 약간 차이가 있을수 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처음 발견된 1928년 발행 여수발전사(저자:가타오카-하카루 인쇄처:히로시마/321P)라는 책에서 일본 천황이 서위하는 しょうさんみ 귀족 위계를 공식으로 사용한 거물 친일파가 새로이 밝혀졌습니다.(증1)
이는 친일기록 문헌상 학계에 처음 보고되는 일로 궁내부 내관(內侍)직 친일파와 일제 수탈(약탈)의 직접 경로였던 부산ㆍ목포ㆍ여수의 항구도시 친일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합니다.
이번에 발견된 여수발전사에서 공식 사용한 친일파 ‘’의 정삼위しょうさんみ 위계는 일본 천황이 일본국에 공적이 있는 장관(大臣)급에게 주는 상급위계(上級位階) 백작(伯爵) 관위(官位)
(http://www.yahoo.co.jp/ 正三位-Enter- 뜻과 명단) (증2) 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의 감추어지고 숨겨진 친일 행적을 상상하게 합니다.
을사오적 ‘이완용’(1858~1926) 민족반역자 ‘송병준’이 생존 당시 일본 천황에게 받은 최고 위계가『』しょうさんみ였습니다.
(1918년 4월 10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훈일등 백작 이완용을 正三位』로 敘한다.)(증3)
그래서 그의 일생을 추적해보니 그는 1867년 3월 23일 영광김씨 김식현과 수원김씨 김양업의 장남으로 태어나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시해사건(말미에 별도해설) 10개월 후인 1896년 6월 25일에 황실재정을 담당하는 회계원주사(증4)(승정원일기)/를 시작으로 1899년 10월 23일 분시종원주사(증5)/ 1905년 2월 20일 내장원(별지1) 내장사주사(증6)/를 거쳐 1906년 6월 27일 의원면직(증7)하기까지 황실보물과 재정을 관리하는 세전·장원업무 담당으로 10년의 궁내부직(내관=내시) 근무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1908년 1월 7일 ‘역둔토지방조사위원’으로서 ‘역둔토 조사후 처리결과와 지방조사위원의 추가선정 보고위원회’ 회의에서 황해도의 / 의 역둔토를 받습니다.(증8)※역둔토(역토/둔토로 구분하는 황실토지=/ 은 마을의 단위)※자신의 자택 출입문을 ‘서흥문’이라 칭하고 자신이 태어난 곳을 일찍이 여수의 호좌수영지/호남여수읍지에도 없었던 지명인 ‘봉산리=봉산동’이라 칭함
이어 김한영은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체결 이틀 전인 8월 27일에 친일 앞잡이인 윤웅렬/이재각 일파들과 육품의 서품에서 일거에 정삼품으로 승서(陞敍)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순종4권 융희 4년 8월 27일)(증9)
이는 한일합병 이틀 전의 인사행위라는 점에서 궁내부에서 시종내관직을 수행하는 자로서 조선 패망에 깊은 관련을 시사하며 기록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이후 1912년 6월 19일 관보에 의하면 여수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증9-1)으로 진남관 석탑에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석각한 김중우와 함께 취임합니다.
1913년 6월 2일 관보에서는 동생 김한승(친일인명록기록자)과 나란히 학교 발전의 공로로 천황이 포상하는 もくはい를 하사받으며 1915년에도 동생 김한승과 재차 목배もくはい 포상을 받았습니다.(=일본 황실에서 하사하는 의 일종)(조선총독부 관보 증 9-2)
1920년에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여수/순천/광양/고흥을 취재 지역으로 여수지국장(동아일보 1920.8.5일자)(증10)을, 둘째동생 김한성을 총무에, 조카 김우평(초대 부흥부 장관/김한승의 아들)을 기자로 여수지역의 정치·경제·사회·언론을 장악합니다.(1929.2.16 동아일보 조카 김관평 지국장-셋째아들 김정평 총무)
당시 여수 일본인 후지타니 사쿠지로(藤谷作次郞)가 위계(증11)인 것을 비교할 때 여수발전사 발간을 축하하는 우두머리 자리에 이라는 그의 존재는 친일권력 최고봉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친일파들의 공통적 특징인 축적 재산에서도 은 해안가인 여수에서 800두락(마지기) (논200평/밭300평) 20만평 이상의 토지와 임야, 소작인을 갖추고 호적상 첩(妾)이 둘이었습니다.(1928년 차남 김준평의 조선총독부 검사시보 인사서류에 포함된 재산상황 기록표와 호적참조) (증12)
공유수면매립에서도 1928년 봉산리 71번지 1025평/ 1929년 봉산리 71번지 550평/1931년 봉산리 지선 539평을 조선총독부에서 김한영 소유로 취득 한 기록 (증13)을 찾았으며,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보낸 보고서인 ‘임진장초’ 1593년 2월 26일자에 등장하는 돌산『둔전목장』(군사적 목적으로 말도 기르고 농사도 지었던 황실재산)이 1900년 12월에 발행된 돌산군지 ‘여산지’ 기록에서 김한영이 근무한 ‘내장원’에서 직접 관리한 사실(별지2)도 확인되면서 조선패망 이후 둔전목장 토지 소유주가 누구인지 현재 소유주에 대한 문서 확인만 남았습니다.
1901년 1월 9일 부임한 여수군수 이가 여수군 소재 24개동 畓(논)의 면적과 생산량 그리고 소작인 이름과 수를 보고하는 영친왕궁궁답분정개량안(별지3)에 보면 황실보유 논이 1,056 마지기에 340가구가 경작해서 먹고 살았으며 1928년 1월 21일 당시 김한영 답(畓)이 800마지기(소작인 200가구 이상 추정)라는 사실에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05년부터 여수궁답분정개량안 보고가 없는 사실(규장각 보관)에서 황실토지의 여수 소유주 추적 시급)
당시 논 한마지기에서 벼 두섬 남짓 나오는데 지주들은 1석 3두 5승(13말 5되)을 받아낸 기록을 보면서 피폐한 우리 조상의 삶을 봅니다.
김한영의 첫째동생 김한승은 1914년 10월 20일자로 화양면 안정리 지선을 안정포로 간척한다는 명분으로 16.49정보를 대부허가를 얻는 것을 시작으로 1918년 여수면 식림계장으로 있으면서 광무동 장군산 16.56정보를 조림 목적으로 대부받고(증15) 1927년 문수리 산34번지/미평리 산116번지/왕십리(둔덕동)산175번지/ 쌍봉학용리 산99-1번지등 총 54정보의 국유임야를 자신을 ‘갑’ 소작인으로 추정되는 14명을 ‘을’로 해서 대부받았습니다.(증16)
또 1919년 7월 10일 문서에는 인근 주민들이 평소 땔감나무를 하는 곳으로서 서정 254번지의 손성삼씨 외 71인이 출원한 장군산 국유산야대부원(면적24정보)서류를 대표자 ‘손성삼’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올려서 대부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문서번호를 보면 문서3장을 없애버림-아마 71명 명단인 듯함)(증14) 그런데 실측도를 보면 바로 옆에 자신의 친형 김한영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광양군에 있는 김한승 자신의 논 수백마지기에서 마지기당 벼를 서말씩 더 받아 말썽이 생기자 소작인연합회에서 소작료를 납부치 않겠다고 강경하게 나오니까 일백여명의 소작인에게 더 받아 낸 소작료를 현장에서 일일이 감해준 신문기사가 1924년 1월 5일 동아일보 2면에서 확인될 때 친일파들이 우리민족에게 악행한 수탈의 전형을 보여줍니다.(1924년 1월 5일 동아일보 신문기사)(증 14에 함께 첨부)
나아가 둘째동생 김한성은 1929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쌍봉면 학용리/시전리 지선(당시 도면과 지도참조)에 대해 답(畓)을 목적으로 7만 7천 7백 4십 1평(논 388마지기-현재 대지)에 대한 매립허가를 면허받아 자신들 소유로 만들어낸 사실도 찾았습니다.(현 여수시청과 소방서 일대)(증17)
/// 네 형제가 여수시내 곳곳에 소유한 토지로 인해 이미 이들의 원성은 극에 달해 소작인과 분쟁하고 대립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사를 김한영 스스로 작성하기도 했습니다.(동아일보 1924년 1월 28일) (증18)
또 봉산동 한산사에서 한재 일대의 이름을 이라 부르는 이유가 1929년 11월 10일 발행된 향교 유림의 목각(木刻)명부인『』에 김한영 자신의 지위를 議官(의관)이라 했으니 이 ‘의관’의 칭호는 1895년 중추원 관제에 정치·법률·이재(利財)에 대한 학식이 풍부한 사람을 내각회의를 거쳐 총리대신이 칙선(勅選)으로 임명한 ‘중추원’ ‘참의’의 앞선 명칭이었으며 1910년 중추원 관제 개편에 따라 참의로 바뀌어 부르게 됩니다. 곧 자신의 동생 중추원 참의 김한승 보다 먼저 ‘중추원’‘참의’ ‘의관’을 했던 것입니다. (증21)(해동청금록) (증22 의관 해설)
1933년 11월 15일에 여수읍 봉산리 346번지에서 김한영이 직접 저술한 ‘영광김씨선세유고집’(증23)을 보면 그의 필체는 일필휘지 명문이었습니다.(그의 학문적 근원지는 ‘내시’를 양성하는 학교인 ‘내자원’이었습니다.)
김한영의 첫째동생 金漢昇(김한승)은 1869년 3월 9일생으로
1906년 여수군주사(승정원일기), 1907년 여수군수서리, 1910년 여수지방금융조합장, 1911년 여수군 참사(參事) 1916년 9월 5일자로 전라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이완용이가 총책임자로 조선토지조사사업을 빙자해서 조선 백성의 토지를 빼앗기 위해 시작된 수탈사업) 위원으로 임명받으며 1918-35년 친일파의 꽃인 중추원 참의에 이릅니다. (조선총독부 관보)(증24)
김한승의 친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수시민의 성지(聖地)이며 이순신 장군과 선대 구국의 혼(魂)이 서린 진남관 경내 돌탑에 1924년 1월 26일 ‘히로히토 천황 결혼한 날’을 기념한다고 ‘東宮殿下御成婚紀念’(동궁전하어성혼기념)이라고 석각(石刻)(석각書 김중우)하고 자신의 이름자를 그 아래에 새겨서 선대의 아름다운 족적 구국충절을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글로 짓밟고 비웃습니다.(진남관 경내 사진과 일본국 궁내부기사) (증25)
김한영 아들들에 대해서는 큰아들 김익평은 경성의전(서울대의대 전신)을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의학부를 수료해서 여수에서 좌수영 의원을 개업하게 했습니다.
(동아일보)(증26)
둘째아들 김준평은 여수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 메이지(明治)사립중학교를 수료하고 1925년 교토제삼고등학교 졸업,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재학 중인 1927년 12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합니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 사법관 시보·검사를 역임하고 1929년 12월 조선총독부판사로 전주지방법원/1931년 대구복심법원 판사/1935년 경성복심법원 판사/ 1941년 평양지방법원부장판사로서 독립단체인 통의부(統義府) 조인현(趙仁賢)·김종철(金宗喆)·오석완(吳碩莞)의 사건을 재판했으며(징역형 언도) 독립운동가 국진순(鞠眞淳)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는등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재판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1930년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 1941년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고, 정오위(正五位)에 서위되었습니다.
그는 또 1944년 12월 경성변호사연맹에서 전의앙양대강연(戰意昻揚大講演=세계 2차대전을 부추키는 연설)을 동대문구 용두실업취체소에서 연설했으며 해방 후 종로구 삼청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있다가 6·25 때인 1950년 8월 6일 납북되었습니다.
[참고문헌]〈昭和4년 刑公 제1591호, 鞠眞淳 판결문〉(전주지방법원, 1930.2.26) 독립유공자공훈록 제4권(국가보훈처, 1987) 조선총독부관보(1930.1.23)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는 김준평 자필이력서) (증2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잡지자료 삼천리 제7권 제3호 1935년 3월 1일 발행) (증28)
서자인 셋째아들 김정평은 1935년 당시 자본금 70만원(당시 덕충동 마래터널 노무자 임금 1일 25전)으로 전남상공주식회사라는 직물공업/무역회사를 만들게 해서 수탈을 목적으로 여수와 시모노세키(下關)를 왕래한 쇼후쿠마루(昌福丸)를 이용해 여수에서 생산되는 면화와 특산품을 일본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한국근현대 회사조합자료) (증29)
임금과 신하의 를 배은하고 망덕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친일파 행위로 국가는 망했고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백성과 독립 운동가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도 죽어서 증손자 이석형씨가 폐묘(파묘)를 해버린 기사를(1979.08.20동아일보/경향신문)(증30) 보듯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지만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국가와 민족에 저지른 친일 반민족 범죄는 시효나 혈연지간이 없습니다.

이들의 조국 배반으로 일제는 힘을 얻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패전’까지 대동아 민족에게 끼친 악행은 놋쇠 밥그릇으로 삽살개에 이르기까지 주권침탈/수백만 인명살상/역사훼손 및 파괴/문화재 도굴 및 강탈/국가·사유재산 강탈 등으로 우리 민족혼을 말살시켰습니다.
‘즈윽히 생각하니 호남 여수는 나라의 보장성이라 만약 호남 여수가 없다면 나라는 없었으리라’ 라고 은유법의 이순신 장군 서신에서 여수 땅의 구국 충절의 용맹성과 위대한 유전인자(DNA)를 확인받습니다.
좁은 여수 땅에서만 약탈한 토지가 확인된 문서로만 61만평(광양/하동/남해/고흥/벌교/보성은 포함 안시켰음) 이니 김한영 형제의 친일 반민족 범죄의 족적과 흔적이 로서 역사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또 다시 자본에 동인하여 일본 천황이 수여한 백작의 관위를 받고 황실토지와 국민의 토지를 점거한 강도요 매국노며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수전노가 지속적으로 생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