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를 신앙의 ‘중심축’을 바로 세운 결정적 사건으로 재조명합니다. 장재형목사의 깊이 있는 통찰을 따라, ‘오직 은혜’라는 복음의 본질이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과 세계 선교의 동력이 되는지를 탐구합니다. 율법주의부터 현대의 인본주의적 도전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하여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의 핵심과 그 생명력에 대해 논합니다.
모든 공동체에는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중력이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 보이지 않는 중심축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사역의 방향이 정해지고, 위기 속에서 무엇을 지킬지 선택된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를 바로 이 중심축을 다시 세운 결정적 순간으로 읽는다.
갓 태동한 기독교 공동체가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씨름했고, 그 결과 교회의 DNA가
명확히 규정되었으며, 세계 선교의 물줄기가 분명한 방향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된 회의록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어야 할 거울이자 나침반이다.
사건의 발단은 안디옥 교회에 불어닥친 신학적 혼란이었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이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는 단지 문화나 예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충분한가?”라는, 복음의 심장을 겨누는 질문이었다. 구원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은혜’라는 정문 외에 ‘할례와
율법 준수’라는 측문을 하나 더 내자는 제안은 겉보기엔 경건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복음의 능력을 희석시킨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을 벌인 사실에 주목한다. 본질이 위협받을 때 타협은
미덕이 아니다. 신앙의 내용이 흐려지면 그 내용을 담는 직제와 제도도 생명을 잃는다. 교회의 ‘Faith and Order’는 항상 복음의 본질에서만
효력을 얻는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대표단 앞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긴 토론을 이어갔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과거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상기시킨다.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구별 없이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증언이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을 차별하지 않으셨다”는 그의 고백은, 구원의
기준이 민족이나 행위가 아닌 ‘믿음’임을 성령께서 친히 입증하신
사건 해석이다. 이어 베드로는 율법을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규정한다. 율법은 거룩하지만
죄인을 의롭다 하지는 못한다. 정죄는 하되 구원은 못 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분명하다. “우리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선언이 예루살렘 회의의 심장이며, 교회의 대헌장이라고 말한다. 이
고백 하나가 교회를 유대교의 울타리로 묶어 두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민족을 향한 보편적 복음의 길을 낸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전하며 그 현장의 생생함을 더한다. 뒤이어 야고보는 선지자 아모스의 말씀으로 판단을 정리하고, 우상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목회적 지침을 담아 편지를 보낸다. 이것은 구원 조건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유대·이방
간의 교제와 성결을 보존하려는 지혜였다. 초대교회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Sola Gratia, Sola Fide)’이라는
중심축을 분명히 세우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랑 안에서 배려하는 질서를 함께 세웠다. 편지에는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놀라운 문장이 등장한다. 교회의 결정은 행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이루어진 분별이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선교의 원심력과 복음의 구심력 사이의 건강한 긴장을 읽어낸다. 세계로 뻗어가는 사명은 ‘복음의 본질’이라는 강력한 중심이 있을 때만 길을 잃지 않는다.
바울의 신학적 투쟁은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선명하다. 그는 복음에
인간의 행위를 한 조각이라도 덧붙이려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은혜는 조금만 섞여도 은혜가 아니다. 포도주의 깊은 향에 물 한 방울을 타면 더는 원래의 맛이 아니다. 이신칭의는
그래서 단순하지만 급진적이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 선언하시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주신다. 믿음은 그 은혜를 붙드는 빈 손이지, 무엇을
보태는 손이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이 원초적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더 세련된 프로그램이나 화려한 건물, 정교한 시스템이
교회의 능력을 보증하지 않는다. 교회의 능력은 언제나, 어디서나, 오직 십자가의 은혜에서 흘러나온다.
이 중심 진리는 종교개혁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개혁은 새로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라 본래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은 중세 교회에 덧씌워진 인간의 공로와
장치를 걷어 내고 복음의 순도를 회복하려는 외침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진정한 개혁은 시대마다 반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쇠퇴할 때마다 근본 원인은 대체로 같다. 은혜의
복음이 희미해진 것이다. 은혜가 교회의 공기처럼 흐르지 않으면, 남는
것은 율법적 기준과 비교, 낙인, 냉소다. 그러나 은혜가 중심축을 차지할 때, 교회는 사랑과 자유 가운데 기쁨으로
순종하는 공동체가 된다.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다.
은혜가 먼저, 열매가 다음이다. 순서가 바뀌면
생명이 사라진다.
예루살렘 회의는 또한 교회의 일치가 무엇 위에 세워지는지를 보여 준다. 안디옥
교회는 분열 대신 연합을 선택했고, 지역 교회 차원을 넘어 사도들과 장로들의 공적 분별을 구했다. 이 과정은 오늘의 교회에게도 지혜를 준다. 자율과 연대, 현지성(로컬)과 보편성(캐톨리시티)의 긴장 속에서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본질에서는 일치, 비본질에서는 자유, 모든 일에는 사랑이라는 고전적 지침이 바로 여기서 살아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선교적 교회의 체질이라고 말한다. 선교의 현장은 언제나 타문화와의 접촉면에서 혼합주의의 위험과
율법주의의 유혹을 동시에 마주한다. 그래서 더더욱 복음의 중심축이 단단해야 한다. 구심력이 약해진 원심력은 결국 궤도를 이탈한다.
현대의 도전은 모양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다. 인본주의적 자유주의는
복음을 인간 이성의 그릇에 맞추려 하고, 뉴에이지는 내면의 신성 개발로 구원을 치환하며, 번영신학은 성공과 건강을 구원의 지표처럼 포장한다. 도덕주의는 윤리적
완벽함을 신자의 자격 시험처럼 만든다. 그러나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해야 온전해진다고 믿는 순간, 은혜의 충족성은 훼손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을 살리는 능력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전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의 은혜(Sola Gratia)와 그 은혜를 붙드는 믿음(Sola Fide)에
있다. 이신칭의는 값싼 은혜를 용인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은혜에
사로잡힌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은 율법의 멍에 아래 신음하는 삶을
벗어나 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옮겨진다.
목회 현장으로 눈을 돌리면, 예루살렘 회의의 지혜는 더 선명해진다. 복음 교육의 중심에는 항상 ‘예수의 충분성’이 놓여야 한다. 새가족 양육에서부터 제자훈련, 직분자 훈련, 세례·성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역의 설계도는 본질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건 훈련이나 윤리 교육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처럼 기능하도록 설계하면 즉시 복음의 중력이 약해진다. 교회의
징계와 치리는 복음의 치유적 목적 안에서만 힘을 가진다. 선교는 현지 문화를 존중하되 복음의 진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 교회의 연합 사역은 행정적 통합이 아니라 ‘성령과 우리는’의 분별 위에 세워져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모든 실천의 배후에 예루살렘 회의가 증언하는 복음의 구조가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교회는 본질로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며, 자유로 사역의 다양성을 누린다. 그러면 복음의 생명력은 자연스레
밖으로 흘러간다.
역설적이게도, 은혜의 복음은 사람을 더 진지한 헌신으로 이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을 맞고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했다. 계산된
종교적 행위로는 설명되지 않는 삶이다. 은혜는 사람을 자유하게 만들되 나태하게 만들지 않는다. 은혜는 책임을 면제하는 공짜 표가 아니라, 거듭난 심장에 부어진
새로운 동력이다. 그래서 은혜 중심의 교회는 언제나 선교 중심의 교회가 된다. 예루살렘 회의 이후 복음이 더욱 담대히 이방 세계로 흘러간 것도 이 때문이다.
중심이 분명할수록 지평은 넓어진다.
결국,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중심축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이유는 대개
단순하다. 은혜가 공기처럼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돌아오라.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며,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본질을
붙들면 길이 보인다. 길이 보이면 교회는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살아난 교회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사랑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중심축이 바로 선 교회, 은혜가 흐르는 공동체, 믿음으로 사는 성도—이것이 사도행전 15장이,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는 교회의 미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