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사람으로 살아남기: 거절하지 못하는 심리의 시작
“괜찮아, 내가 할게.”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 말이, 당신을 서서히 소진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감당하기 벅찬 일을 떠안고, 상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무리하게 응하며, 내 감정보다 타인의 기분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때로는 자기 파괴적인 습관이 된다.
거절 불안의 뿌리는 대부분 어릴 적 형성된 사회화 과정에서 시작된다. “어른들 말은 잘 들어야 해”, “네가 참아야지”, “싫어하면 이기적인 거야”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거절은 나쁜 행동’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을 익힌다.
심리학자 하리티 로젠버그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타인의 수용’을 자기 존재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지적했다. 즉, 거절당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하는 것조차 ‘관계의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거절은 죄가 아니다 : ‘아니오’에 대한 왜곡된 인식
많은 이들이 거절을 ‘관계를 끊는 행위’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진짜 관계는, '예스'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한 거절이 있는 관계일수록 더 오래, 더 진실하게 지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아니오’라고 말하는 걸 이렇게 어려워할까? 첫째, 거절은 타인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죄책감을 유발한다. 거절당한 경험이 상처로 남아 있는 사람일수록, 상대도 같은 상처를 받을까봐 더 조심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종종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특히 직장이나 친구 관계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단 한번의 거절이 모든 관계를 무너뜨릴 것 같은 불안감이 거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셋째, 사회적 규범은 여전히 ‘헌신’과 ‘희생’을 미덕으로 요구한다. 특히 여성이나 후배, 막내 같은 사회적 역할에 놓인 이들은 더욱 거절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나’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결국 내가 아닌 나를 만드는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소진되는 나, 만족하지 않는 그들 : 거절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들
거절을 하지 못하면, 가장 먼저 피로해지는 건 ‘나’다. 감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갈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무기력, 분노, 불면, 의욕 저하 등 심리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내 감정을 억누르고 타인의 요구를 우선할수록, 자기 존중감은 떨어진다.
하지만 더 심각한 건, 타인은 쉽게 당연함을 학습한다. 처음엔 부탁이었지만 나중엔 ‘의무’가 된다. "얘는 원래 다 해주잖아",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이렇게 되면, 나는 누군가의 ‘감정 정리창’, ‘무료 서비스 제공자’로 전락한다.
또한, 거절하지 못한 채 감정을 억누르다 보면 언젠가는 폭발하게 된다. 작은 부탁에 과도하게 짜증내거나, 돌연 연락을 끊는 식의 불균형한 대응이 나타난다. 상대는 이유를 모른 채 당황하고, 관계는 어그러진다. 결국 거절하지 않음으로써 관계를 지키려던 노력이 관계를 망치는 역설이 되는 것이다.
‘아니오’의 기술 : 나를 지키는 건강한 경계 설정법
거절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기술이다. ‘아니오’를 말하는 법은 연습이 필요하며, 그 시작은 ‘감정 인식’이다. 내가 불편한데도 웃고 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를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건강한 거절을 위한 4가지 연습법이다
거절에도 ‘예의’를 담자
“미안하지만 이번엔 도와주기 어려워.”
“지금은 내 일정이 꽉 차 있어서, 다음에 도와줄게.”
거절의 이유를 지나치게 설명하지 말자
설명이 길어질수록 상대는 ‘틈’을 노리게 된다. 짧고 단호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말하는 게 핵심이다.
‘No’ 대신 대안을 제시하자
“지금은 어렵지만, 다음 주는 괜찮아.”
“내가 하긴 어렵지만, ○○한테 도움을 요청해 보면 어때?”
거절 후에도 흔들리지 말자
상대가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의 감정이며, 나의 책임이 아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거절은 인간관계를 망치는 무기가 아니라, 나를 지키고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방패다. 자주 거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거절을 못해 계속 참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용기
거절을 못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실,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받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한다면, 결국 나는 내 존재를 잃게 된다. 진짜 사랑은 거절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나를 존중할 때, 타인도 나를 존중한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나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때로는 조용히, “아니오”라고 말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