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데 왜 고통스럽죠?” – 열정 속 고갈의 시작
“좋아하는 일을 하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된다.”
이 문장은 SNS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인용구처럼 소비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기대를 품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자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이상한 벽에 부딪힌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피로하고 무기력하며, 더는 의욕이 나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열정 번아웃(Passion Burnout)’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는 단순히 ‘과로’에서 오는 탈진과는 다르다. 오히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기에 더욱 깊게 몰입했고, 그만큼 스스로를 더욱 빠르게 소진시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번아웃은 우리가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쉽게 찾아온다. 좋아하니까 더 열심히 했고, 더 잘하고 싶었고, 그래서 쉴 틈 없이 자신을 몰아세웠다. 하지만 인간의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결국 ‘좋아하는 감정’조차 고갈되고 나면, 남는 건 정체 모를 무기력과 자기혐오다. 이 지점이 바로 '열정의 역설'이다.

창의적 번아웃 : 꿈을 좇는 이들이 가장 먼저 무너지는 이유
크리에이터, 디자이너, 작가, 창업가처럼 창의성과 자율성이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번아웃은 흔한 문제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미 브셰스니프스키는 "자기 일에 열정적인 사람일수록 번아웃에 더 취약하다"고 분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과 자아를 쉽게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콘텐츠가 곧 나'라는 생각은, 그 성과가 좋지 않으면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게 만든다. 게다가 창의적인 일은 ‘결과의 모호함’과 ‘자기 검열’이라는 큰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고객의 피드백, 시장의 반응, 상사의 취향은 내가 아무리 진심을 다해도 매번 예측할 수 없다. 매번 자신을 갈아넣은 작업이 단 한 줄의 악평으로 부정당할 때, 번아웃은 더 깊어진다.
또한 ‘몰입’이 잦을수록 회복력은 떨어진다. 집중력과 감정 에너지를 동원하는 창의 노동은, 단순 반복 업무보다 훨씬 많은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무시한다.
사회가 만든 ‘좋아하는 일’의 덫 – 자발적 소진의 구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번다고?”
이런 말에는 늘 묘한 압박이 따른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경제적 성취까지 이뤄야 한다는 이중의 기준에 갇혀 있다. 열정은 이제 ‘성공의 전제 조건’이 되었고, ‘좋아하면 당연히 더 잘해야 한다’는 식의 압력이 뒤따른다.
특히 MZ세대에게는 ‘자기다움’과 ‘일의 의미’가 중요하다. 그래서 회사는 유연근무제, 자율복장, 자유로운 팀 문화를 제공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를 유혹처럼 던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뒤에 숨은 구조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야근도 괜찮지 않냐’, ‘재미있잖아, 버텨봐’라는 말은 결국 개인의 열정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다. 이처럼 시스템적 보호 없이 ‘열정’을 개인의 문제로만 두는 사회에서는, 번아웃은 불가피한 결과다. 자발적 몰입을 강요받는 노동은 노동자의 자율성을 위장한 착취가 될 수 있다.
번아웃을 마주한 나,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열정이 소진됐다고 해서 그 일을 영원히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니다. 번아웃은 ‘더는 못하겠다’는 내면의 비상벨이다. 진짜 문제는 ‘왜 이렇게 된 건지’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 채 무작정 다시 달리는 것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멈추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의도적인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그 일에서 자아를 분리해보는 연습, 즉 ‘일 = 나’라는 등식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다음은 자기 내부를 관찰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어떤 구조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속에 내 몫의 책임과 사회적 구조의 압박이 어떻게 섞여 있는지를 분리해보자.
그리고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건 ‘공동체’다. 공감 가능한 대화, 건강한 경계 설정, 열정 이면의 회의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전문가의 상담도 큰 도움이 된다. 번아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건강하게 일하려는 몸의 신호일 수 있다.
번아웃은 실패가 아니라 전환의 징후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행복해야 해”라는 말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도 지칠 수 있고, 오히려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열정이 있었다면 그만큼 쉬는 자격도 있다. 번아웃은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전환의 징후다.
이제 우리는 묻고 행동해야 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가?”
“나의 열정은 나를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진시키고 있는가?”
쉬는 건 도망이 아니라 복원이고, 멈춤은 낭비가 아니라 회복의 첫걸음이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만큼 쉬는 법도 배워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