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를 향한 집착, 신을 향한 절망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 딕』(Moby-Dick)은 거대한 흰 고래를 향한 집요한 추적담이자, 인간 존재와 신을 향한 심연의 고뇌가 충돌하는 작품이다. 선장 에이해브가 고래에 다리를 빼앗기고 집착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다. 그는 고래 안에 ‘절대자’를 본다. 그리고 그 절대자에 맞서 싸우려는, 인간의 오만하고 절박한 몸짓이다.
에이해브는 인간이 신에게 순응하길 강요받는 기독교적 질서를 거부한다. 그는 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신의 심판을 받았다고 믿고, 그에 맞서는 전쟁을 선언한다. 고래는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신의 대리자이며, 세상의 불합리와 고통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개신교적 운명관과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멜빌은 성경의 세계관을 인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비틀고, 해체하고, 인간의 절망을 강조한다. 그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선장 에이해브와 욥기의 전복: 인간과 신의 대결
『모비 딕』을 읽다 보면 가장 자주 소환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욥기다. 욥은 고통과 재앙 속에서도 신을 향한 믿음을 유지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에이해브는 정반대다. 그는 욥과 같은 고통을 당하고도 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신을 비난하고 도전한다.
에이해브의 “나는 그를 때려눕히겠다, 그가 하늘에 있든 지옥에 있든 간에!”라는 대사는 인간이 신과 대결할 수 있다는 신성모독적 선언처럼 들린다. 이는 곧 기독교 신관의 전복이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인간이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순응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러나 에이해브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신에게 책임을 묻는 쪽을 선택한다.
멜빌은 이러한 인물을 통해, 신의 정의는 과연 존재하는가, 신은 왜 침묵하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들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비 딕』 속 성서 인용, 믿음인가 조롱인가?
『모비 딕』은 성경의 어휘와 상징, 구절로 가득하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부터가 ‘이쉬메일’(아브라함의 첩 하갈의 아들), ‘에이해브’(이스라엘의 사악한 왕) 등 성서에서 따왔다. 멜빌은 성경을 단순한 신앙의 상징이 아니라, 비판적 담론의 도구로 사용한다.
특히 작품 초반 이쉬메일이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설교자는 요나의 고래 이야기, 즉 불순종한 인간이 신에게 회개하는 이야기로 선장의 항해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이는 이후 에이해브의 행보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처럼 멜빌은 성경을 내러티브의 장치로 삼되,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적 텍스트로서의 성경을 문학적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다.
믿음의 언어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되고 뒤틀린다. 이는 신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철학적 고뇌이며, 멜빌은 그 질문을 교리보다 문학으로 대답하려 한다.
신의 침묵과 문학의 대답, 멜빌이 남긴 질문
『모비 딕』의 끝은 파괴와 침묵이다. 에이해브는 죽고, 고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유일한 생존자인 이쉬메일만이 이 거대한 광기의 파멸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는 죽음과 고요 속에서 떠오르며, 독자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남긴다.
멜빌은 이 마지막 장면에서 신의 침묵을 강조한다. 그 어떤 계시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오직 인간의 광기만이 남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질문을 남긴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왜 이렇게 침묵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문학이다.
문학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지만, 의심을 견디게 한다. 멜빌은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신의 자리를 성찰과 질문, 그리고 문학적 사유로 대체한다. 그것이 바로 『모비 딕』의 위대함이자, 지금도 전 세계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