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상추가 제맛입니다. 4월의 변덕스러운 날씨로 눈도 맞고 영하로 영상으로 오르내리는 기온을 모두 견뎌서 일까요. 매년 심는 상추지만 올해 상추가 별나게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모종을 구입해서 정식한 건 단단하게 포기를 이루고, 3월부터 집안에서 씨를 뿌려 모종을 낸 상추는 여리여리 너풀거립니다.
특히 아삭이 상추는 두툼해서 한입 크게 베어 물면 감자칩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상추가 머금었던 수분이 입안 가득 터져 나옵니다. 연한 상추는 연한 데로 푸릇하게 생기가 돌고 스르르 녹는 맛이 있으니 겉절이로 제격입니다.
이날도 새벽에 일어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왼손으로 상추 몸통을 잡고 겉잎을 똑똑 따서 한 바구니 가득 담아 엄마집으로 갔습니다. 엄마를 씻겨 놓고 엄마가 옷을 입는 동안 아침을 준비합니다. 찐계란 2개와 견과류, 밥 반공기 그리고 상추면 족합니다.
두어 번 씻어 맑게 진 상추를 탈탈 털어 양푼에 담아 고춧가루를 먼저 입히고 식초, 간장, 설탕, 들기름을 둘러 무쳐서 입을 한껏 벌리고 먹는데 달팽이가 나옵니다. 무심코 꺼내놓고 그대로 식사를 마쳤습니다. 노인주간복지센터에 가려면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필라테스 유투버를 따라 엄마와 팔운동을 하는데 뭔가 곁눈으로 스치는 게 있습니다.
아뿔싸 고춧가루를 패각에 묻힌 달팽이가 더듬이를 쭉 내밀고 유유히 기어갑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는 건 원래 그런 거라는 듯, 매운 고춧가루, 시큼한 식초, 짠 간장, 미끌거리는 들기름을 모두 이겨내고 제 길을 갑니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내 생의 본능으로 그냥 살아지는 거라고,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태연한 뒷모습이 사랑스러워 흐르는 물에 살살 목욕시키니 움찔움찔하면서 안에 남아있던 고춧가루를 밀어냅니다. 그리곤 ‘부디 잘 사시게’ 마음을 담아 1층 화단에 고이 내려놓았습니다.
10년 전 지인에게 달팽이 5마리를 분양받아서 키워더랬습니다. 쉬지 않고 꼬물거리며 상추를 순식간에 먹어버리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 보고 있으면 잡념이 없어지곤 했지요. 주방에 일이 생겨 잠시 자리를 비우면 달팽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두 없어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멀리 못 같을 것 같지만 의외의 곳에서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쉬지 않아서 가능할 테지요. 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그런 느낌 말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풀을 베는 농부는 들판의 끝을 보지 않는다.’ 할 일을 두고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또는 오지 않은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요. 순간순간 온몸을 내딛는 달팽이의 느릿한 걸음이 풀 베는 농부를 닮았습니다. 자기 속도로 지금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당차면서도 가벼워 보이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독자님, 오늘 어떤 일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가벼운 하루이기를 바라봅니다.
K People Focus 최영미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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