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하늘의 이치라는 생각이다.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이는 죽음 자체의 공포를 넘어, 사후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세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다가가는 길이라고 보았다. 반면 니체는 “현실에서 충실한 삶”을 추구하며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종교적 관점은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부활과 영원한 영적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불교는 현세의 삶과 깨달음을 중시하면서 사후 윤회설을 내세운다. 이슬람교는 알라만 천국에 가고 그 외는 낙원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죽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것일까. 막연한 두려움은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야 한다. 죽음은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생을 다 하는 날까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살아가야 한다.
나는 ‘삶의 의미’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를 감명 깊이 읽은 적이 있다. 진한 울림을 받았다. 그는 삼년 반 동안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매일 하루살이 벌레와 같은 죽음이 오가는 극한상황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 돌아온 것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태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몸소 겪으며 얻은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삶의 의미’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달리한다. 요즘 내 주변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이 들여 다 본다. 한 친구는 인생 후반부에 장애인 활동 지원사를 택했다. 밥 먹는 것, 잠자고 일어서기조차 혼자 할 수 없는 특수 중증 장애아를 위해 자신의 삶은 내려놓고, 반쪽 몸이 되어 동행의 삶을 살아간다. 주거지도 아예 인천에서 장애아 거처인 원주로 이사 했다.
제주도에 동기가 있다 고향에 내려와 지역 곳곳에 안내 현수막을 내걸고, 어르신들을 찾아 고장 난 보일러. 전기, 수도 등을 수리해 주는 일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휴일이면 섹소폰 위문공연에 나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육지의 방문 친구들에게 줄 제과를 굽는 기술까지 익히고 있는 중 이란다. 그야말로 삶을 즐기고 베풀며 살아간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사막을 찾은 적이 있다. 미친 듯이 덥고 50도를 넘는 따가운 태양열. 하얀 소금으로 덮인 광활한 사막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존재는 간데 없고 한낱 미세한 티끌에 불과했다. 일행이었던 LA 근무 직장 동료는 인문학의 3대 질문이라 일컫는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는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답을 얻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들려주었다. 캄캄한 밤하늘. 무수한 별들과 무언의 대화로 삶의 본질을 헤아리다 보면,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환희를 느끼곤 한단다. 제법 철학을 담은 한 차원 높은 진지한 삶을 누려간다.
이처럼 이들의 삶은 아름답고 평화의 파장이 넘쳐 난다. 안이한 삶에 귀감과 자극이 되어준다. 이 세상에 살며 더러는 일찍 가기도 하고, 더러는 조금 더 머물다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한 줌의 권세나 부를 가졌다 하여 우쭐대지 말자. 때로 힘들고 시련이 있더라도 좌절하지도 말자. 모든 것은 지나간다. 삶의 의미 그리고 죽음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 생각한다
언젠가 죽는다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와 현재의 삶에 충실 하라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이 주는 교훈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자.
양홍석
전)문화체육관광부 일반직고위공무원
전)2014인천아시안게임 행사본부장
전)강원랜드 카지노본부장








